국민의 정부에서 참여 정부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16대 대선에서 ‘노풍(노무현 바람)’이 불 것이라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당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이회창 대세론을 보란 듯이 잠재웠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역전에 정치적 촉이 밝은 일부 공직자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2002년 대선을 앞둔 즈음 관료의 행태는 이랬다. 첫 번째는 해외 파견을 나가 소나기부터 피하자는 부류다. DJ 정부에서 잘 나간 공무원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했다. 두 번째는 집권 민주당으로 파견 나간 관료다. 1급인 당 전문위원은 정권 초기에는 꽃 보직이지만 정권 교체를 앞두면 그야말로 찬밥 신세다. 이들은 어떻게든 대선 전에 탈출하려 몸부림쳤다. 세 번째는 잠재적 집권 세력에 줄을 대려는 부류다. 지금은 덜 하지만 과거 관료사회는 실력과 경륜 못지않게 연줄이 출세와 승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공직자 대다수가 그렇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정치 바람을 타는 게 독배 들기와 다름없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적으로 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회창 대세론이 노풍에 무너져버린걸. 해외 파견을 자청했던 공직자는 내정인사를 없던 일로 하고 본부에 눌러앉았다. 당 전문위 파견자는 하루아침에 화색이 변했다. 사석에서 평소 쓰지 않던 사투리를 구사하며 “서울 출신은 그냥 서류상일 뿐”이라며 묻지도 않은 고향을 들먹이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 기억이 생생하다.
한참 지난 과거 얘기를 꺼낸 것은 ‘영혼 없는 공무원’ 문제가 15년이 지난 지금 자못 심각한 상황으로 흘러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공직사회는 패닉에 휩싸였다. 비선의 전화 한 통과 말 한마디에 저렇게도 철저히 유린당했는가 하는 모멸감이 첫 번째 충격이라면 속된 말로 ‘까라면 까야 하느냐’는 자괴감이 두 번째 쇼크다. 이명박 정부 시절 장관을 역임한 정통 경제관료는 며칠 전 만난 자리에서 “장·차관의 가치가 똥값 됐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관료사회에 영혼이 없어진 지 오래다. 통수권자의 국정 과제가 5년마다 바뀌는 마당에 관료의 신념과 철학·강단을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이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저 유명한 ‘프로테스탄티즘윤리와 자본주의정신’에서 이상적인 관료는 영혼이 없어야 한다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관료집단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비판한 이 말은 관료는 전문성을 갖추고 공복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최순실 사태는 ‘영혼 없음’이 베버가 말한 공복의 차원을 뛰어넘었다. 뭔가 꺼림칙하면 기록해놓고 녹음 앱을 받아놓겠다는 얘기가 그냥 우스개가 아니다. 이쯤이면 정책 협업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문제의 핵심은 역시 정치권이다. 줄서기를 강요하고 과거 정부 인사라면 부역자로 낙인 찍고, 전 정부정책은 무조건 갈아엎는 구태가 반복된다면 제2의 최순실이 등장하지 않으리라 보장 못한다.
출발은 청와대에 포진한 비관료 출신 ‘어공(어쩌다 공무원)’ 수를 줄이는 일부터다. 전문 관료인 ‘늘공(늘 공무원)’에 절대 우위에 서 있는 이들이 통치철학을 운운하면서 영혼이 있니 없니 닦달할 계제가 못 된다. 구태여 ‘영혼 없는 공무원 방지법’을 만들려고 헛힘을 쓸 일도 아니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최순실 일당의 분탕질 창구가 된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기능 개편까지 갈 수 있겠다. 어차피 끗발이 두 단계 높은 경제부총리가 있지 않는가. 수석이든 보좌관이든 청와대 경제사령탑의 역할을 대통령 어젠다의 이행 점검과 관리에 국한하자는 얘기다.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대권 주자들이 청와대에 출입기자의 비서동 방문을 허하겠다고 공언해달라는 거다. 출입을 막아놓고 대통령 말씀자료만 받아쓰라면 구중심처에서 벌어지는 국정농단의 싹을 감시할 수 있을까. 관언유착 방지라는 저급한 핑계는 낡아 문드러진 지 오래됐다.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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