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기세에 짓눌려 기를 못펴던 외화들이 ‘로건’, ‘23 아이덴티티’ 등 대작과 89회 아카데미 수상작 ‘문라이트’,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등을 중심으로 3월 들어 일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특히 개봉 6일 만에 100만 명을 돌파한 ‘23 아이덴티티(2월22일 개봉)’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2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1일까지 이 작품은 131만6,000여명을 동원했다. ‘식스 센스’를 연출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연출을 맡은 ‘23 아이덴티티’는 해리성인격 장애를 겪은 빌리 밀리건의 실화가 바탕이 됐다. 23개의 인격을 가진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은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24번째 인격의 지시로 3명의 소녀를 납치 감금해 그가 오랫동안 진행하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소녀들이 도망을 치려 할 때마다 수시로 나타나는 여러 인격들은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특히 9살 아이, 야수, 섬세한 여성 등 수시로 변하는 인격들을 완벽하게 소화한 맥어보이의 연기력과 ‘상처받은 사람들의 방어체계와 진화’라는 메시지가 어우러져 스릴러물이 주는 공포가 아닌 감동을 선사한다.
‘엑스맨’(2000)부터 17년간 9번의 작품으로 이어진 울버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로건’도 반응이 뜨겁다. 개봉 첫날인 지난 1일 25만 6,000명을 동원하며 청소년관람불가 외화 사상 최고 오프닝 기록 달성한 것. 히어로로서의 능력을 잃어가는 로건(휴 잭맨)은 멕시코 국경 근처의 한 은신처에서 병든 프로페서 X를 돌보며 살아간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고자 했던 로건은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쫓기는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최후의 대결을 펼친다. ‘더 울버린’(2013)을 연출했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전 세계적으로 단단한 마니아층을 보유한 ‘엑스맨’ 시리즈는 한국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2014년 5월 선보인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국내 관객 430만 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대표적 ‘지한파’ 스타 휴 잭맨은 개봉 전 열린 ‘로건’ 라이브 컨퍼런스에서 “그동안 한국 팬들이 ‘엑스맨’, ‘울버린’ 시리즈를 많이 사랑해주셨다”고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남우조연상, 각색상 등 3관왕에 오른 ‘문라이트’와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지난 2월 개봉한 이 작품들은 오스카 수상 이후 ‘역주행’을 보이고 있다. ‘문라이트’는 미국 마이애미의 한 흑인 빈민가에서 마약중독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소년 샤이론의 성장기와 성정체성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희곡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가 원작이다. 특히 이 작품은 언어가 빠진 영화가 ‘한 폭의 시’로 탄생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대사를 배제한 채 서정적인 이미지로 관객에게 다가선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가족을 잃은 기억을 꼭꼭 숨겨둔 채 슬픔마저 표현하지 않는 리(케이시 애플렉)를 통해 인간의 깊은 고독을 이야기하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도 관객들이 주목하고 있다. 특히 모든 슬픔을 꾹꾹 눌러 담아낸 케이시 애플렉의 초점을 잃은 공허한 눈빛 연기는 이 작품의 백미로, 애플렉은 리 역할을 통해 형 벤 애플렉의 후광에서 벗어났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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