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율은 낮아도 손학규만 한 지도자감은 드물다.”
이는 국민의당 대선주자인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에 대한 정치권과 정치학자들의 평가다. 과거 대통령선거에서는 당내 후보 경선조차 통과하지 못했지만 일단 대선 본선에 나선다면 승리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는 의미다. 심지어 다른 유력 대선주자의 선거 캠프에 몸을 두고 있는 한 실무자조차 “현재의 대선주자 중 손 전 대표만큼 콘텐츠와 인품을 잘 갖춘 사람은 없다고 본다. 실력에 비해 저평가됐다”고 지적할 정도다.
각종 여론조사에서의 지지율은 낮지만 손 전 대표를 빼놓고서는 현재의 대선 판세를 논하기 어렵다.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더불어민주당에 맞설 대안 후보를 내기 위한 범중도·보수 진영의 각축전에서 손 전 대표는 잘되면 주연, 못돼도 주연급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가 최근 더불어민주당을 떠나 국민의당 대선주자로 입당함으로써 국민의당은 대선후보 경선을 흥행시킬 캐스팅을 마칠 수 있었다.
손 전 대표는 각종 연설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할 당시 정책적 정체성을 설명하고자 자신을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주의자’로 표현하기도 했고 경기도지사 시절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복지행정’을 펼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인간성을 강조하며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 ‘대권후보’ 한 번 된 적 없는 손 전 대표를 당적에 관계없이 따르는 의원들이 널리 포진해 있다.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한 굴곡의 역사=손 전 대표의 정치적 상품성은 그의 인생역정에서 비롯된다. 그는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전면에서 감당해왔다. 1964년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6·3항쟁부터 3선개헌반대시위, 박정희 정권의 마침표를 찍게 한 부마항쟁에 이르기까지 손 전 대표는 민주화 운동의 최전방에 서 왔다. 특히 박정희 정권 당시 수배를 받던 중에도 어머니 장례식장에 참석했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일화는 민주운동가들의 입에 단골로 오르내리는 이야기로 꼽힌다. 손 전 대표는 청춘 시절의 대부분을 노동운동으로 보냈다. 그는 1972년 졸업 후 서울 구로공단에 위장취업을 했다. 위장취업 동기는 소설가 황석영이다. 이후 수배를 받아 도피와 수감을 반복하며 청춘을 보냈던 손 전 대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도움을 받아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가 정계에 진출하게 됐다.
◇‘전향’ 꼬리표, 고독한 정치인생=민주화의 주역인 손 전 대표에게는 핸디캡이 있다. ‘전향의 정치인’이라는 꼬리표다. 1990년대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탄생한 민주자유당에 입당한 것이 꼬리표를 달게 된 계기였다. 당시 합당을 정치개혁을 좌절시킨 정치적 야합으로 규정했던 민주운동권 일각에서는 손 전 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기도 했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제안으로 민자당에 입당했던 손 전 대표는 광명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3선을 지냈다. 2002년에는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며 정치인생 최고의 주가를 기록하게 된다.
그의 정치인생에서 또 다른 논란은 2007년 한나라당 탈당에서 재연된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박근혜 의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대선주자였던 손 전 대표가 당적을 버리고 열린우리당으로 투신한 것이다. 이에 대해 손 전 대표는 한나라당에는 더 이상 개혁세력이 남아 있지 않아 당을 혁신하기 어려웠다고 배경을 밝혔지만 논란이 적지 않았다. 손 전 대표는 당시 야권으로 옮겨와 당 대표, 야권의 험지인 분당에서의 당선 등을 통해 정치적 확장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대선 이후 다시 등판했던 2014년 수원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며 전남 강진으로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손 전 대표의 행보는 정치인생 최대의 암흑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총선 지원을 거부했고 ‘제7공화국’ 개헌을 들고 나왔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이목의 집중을 끌어내지 못했다. 손 전 대표는 국민의당으로 자리를 옮기고서도 안철수 전 대표와 경쟁을 하며 정치적 내상을 입기도 했다. 야권 관계자는 “손 전 대표는 잦은 칩거, 유학 등을 통해 핵심 지지층의 결속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며 “이 때문에 추진력을 얻지 못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시대정신을 던졌던 손학규, 정치인생 마지막 모험=손 전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저녁이 있는 삶’을 내걸었다. 당시 손 전 대표를 이기고 당 대선후보에 올랐던 문재인 전 대표까지 “손 전 대표의 저녁이 있는 삶의 가치를 이어받겠다”고 했을 정도다. 저녁이 있는 삶은 안희정 충남지사,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국민안식제 등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이 밖에도 손 전 대표는 2011년 민주당 당 대표 시절 “나라 운영에 돈을 따지는 게 아니라 사람부터 생각해야 한다”며 “복지는 철학이고 의지”라고 말했다. 당시 민주당의 핵심 공약으로 제시됐던 것이 무상급식·무상의료·무상보육과 반값등록금 정책이다. 이때의 정책은 현재의 민주당 당론으로도 채택돼 2012년 총선·대선과 2016년 총선 주요 공약으로 활용됐다. 2016년 말 정계복귀를 선언한 손 전 대표는 “제7공화국을 열자”며 개헌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던졌다.
이 같은 손 전 대표의 모습은 “민심의 바다에서 민심과 함께한다”는 문 전 대표 등 대중 정치인의 모습과는 차별화된다. 정치인으로서 국민보다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게 측근들이 말하는 손 전 대표의 장점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손 전 대표의 ‘엘리트주의’가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지식인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의식을 느끼며 살아왔던 손 전 대표가 때로는 느리고, 때로는 무거운 민심과 동떨어지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손 전 대표는 안 전 대표와 함께 국민의당 경선을 진행하고 있다. 대중 정치인 안 전 대표에게 맞서 힘든 싸움을 펼치고 있는 손 전 대표가 사실상 마지막 도전의 마침표를 어떻게 찍게 될지 이목이 쏠리고 있다. /박형윤기자 mani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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