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국제시장’ 이후 3년 만에 국내 스크린에 복귀한 김윤진이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시간위의 집’에서 또 한 번 ‘엄마’ 역으로 ‘모성애’를 펼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회적인 외모와 따뜻한 아우라가 어우러지니 영화의 스릴러 분위기 속에서 모성애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충분히 설득력이 가해진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서울경제스타와 만난 김윤진은 오랜만에 갖는 인터뷰 자리에 다소 낯설어 하면서도 이내 흥미롭게 이야기를 펼쳐 나갔다.
“오래 기다렸죠. 개봉 날이 빨리 오기를. 매년 좋은 작품 들고 나와서 이런 인터뷰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일하고 싶은데 오랜만에 찾아뵙네요. 지금은 행복하고 즐겁고 생각보다 편해요. 영화 시나리오를 진짜 재미있게 읽었어요. 데뷔 20년이 됐는데, 여태까지 이런 대본은 진짜 드물었거든요. 늘 봐왔던 우리나라 영화와는 달랐고 신선해서 바로 결정했죠. 결국 가족 이야기인데, 재미를 넘어 애틋하고 무게감 있는 이야기가 나중에 나오는 게 가장 좋았어요. 너무 넘치지도 않게 감독님께서 잘 요리하신 것 같아요.”
김윤진이 주연을 맡은 영화 ‘시간위의 집’은 집안에서 발생한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실종을 겪은 가정주부 미희(김윤진)가 25년의 수감생활 후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오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그린 하우스 미스터리 스릴러. 이 같은 장르는 사실 할리우드 영화로 적잖이 접할 수 있었지만, 한국형으로 녹아났다는 점에서 신선함이 있다. ‘스승의 은혜’, ‘무서운 이야기’로 호러 장르에서 두각을 드러낸 임대웅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검은사제들’(2015) 장재현 감독이 각본에 참여해 특유의 오컬트 분위기가 더해졌다.
“제가 스릴러 장르를 굉장히 좋아해요. ‘라라랜드’, ‘미녀와 야수’ 이런 장르도 좋아하지만, 어릴 때부터 스릴러를 좋아했어요. ‘식스센스’, ‘유주얼 서스펙스’부터 ‘세븐’, ‘디아더스’까지 좋아했는데, 뭔가 추측하고 추리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있어요. 퍼즐을 한 조각씩 맞추는 재미요. 영화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에는 스릴러 장르가 굉장히 매력적인 것 같아요.”
극 중 김윤진은 가정주부 미희 역을 맡아 폭력적인 남편에 시달리다가 아이와 남편 모두를 상실한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살인 누명까지 쓴 후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 집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들 가운데도 아이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공포를 감내한다. 이번 작품에서도 ‘김윤진표 모성애’가 돋보인다.
“제가 여러 가지 캐릭터 중에 굳이 모성애를 고집한 적은 없어요. 제 나이 대 여배우들은 그렇게 많은 캐릭터를 선택할 수 없을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연기한 엄마 역의 캐릭터와 설정은 다 달랐어요. ‘6월의 일기’(2005)에서는 복수하는 엄마 역할이었고, ‘세븐 데이즈’(2007)에서는 아이를 구하는 역할, ‘하모니’(2009)에서는 아이를 보내는 엄마, ‘이웃사람’(2012)에서는 계모이지만 딸을 지켜주는 역할이었어요. 이번에는 운명을 바꾸려는 엄마잖아요. 같은 모성애이지만 작은 선택 안에서 다양하고 색다른 모성애를 보여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이렇게 25년이라는 세월의 터울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지는 않거든요. 제가 이 작품을 선택했다기보다 이 작품에 제가 선택됐다고 봐요. 저는 무조건이었어요.”
‘시간위의 집’에서 김윤진은 확실히 다른 색채의 모성애 연기를 펼친다. 25년의 시간을 건너 40대의 미희와 60대의 미희, 두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채로운 변신을 꾀했다. 특히 60대의 미희는 하얗게 센 머리와 후두암에 걸려 걸걸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세월의 안타까운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본상 후두암 설정은 없었어요. 제가 감독님께 제안한 거에요. 영화에 생생함이 묻어나도록 거친 호흡소리와 현장 소리를 많이 담았죠. 단, 감정 연기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제 목소리가 나오더라고요. 감정선에 몰입하고서 후시녹음 처리도 했죠. ‘국제시장’에서의 경험으로 절실하게 느꼈던 게, 영화적인 설정과 진짜 현실은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할머니는 허리도 굽어있고 목소리도 많이 변해 있잖아요. 사실 60대 초반은 목소리 차이가 거의 없고 카랑카랑한 경우가 많아요. 저는 현실적으로 연기하려 했어요. 후두암 설정은 연기를 확실히 할 수 있는 ‘잔머리’였죠.”
앞서 ‘국제시장’(2014)를 통해 할머니 연기를 선보인 김윤진은 이번 ‘시간위의 집’에서 두 번째로 노인 연기를 하게 됐다. 덕분에 어떻게 분장하고 연기해야 더욱 ‘할머니 같이’ 보이는지 알게 됐다고. 여배우로서의 이미지 관리는 잠시 접어두고 3시간에 걸친 분장도 마다않는 의욕을 불태웠다.
“직업병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뭔가 분리가 돼요. 모니터 할 때도 앵글, 얼굴 각도를 절대 안 봐요. 해당 장면의 전, 후를 생각하고 감정선을 생각하죠. ‘내가 나이 들면 이 정도로 늙겠지?’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어요. 배우는 감독님과 대본이 전달하고자 하는 걸 잘 전달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영화도 대중문화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봐줘야 하잖아요. 제가 역할을 비춰준다고 생각하지 역할이 저를 비춘다고 생각 안 해봤어요. 미국에서 연기 공부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위해 영화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캐릭터를 저에게 끌어당기기보다 제가 캐릭터에 끌려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의 제목대로 촬영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남아있는 충남 논산의 한 적산가옥에서 이뤄졌다. 무려 100년이나 된 집이다보니 난방시설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어 촬영 내내 추위가 가장 큰 복병이었다. “저희가 겨울에 촬영을 했는데 밖보다 안이 더 추웠던 거 있죠. 양말을 3겹이나 신어도 뼛속까지 추웠어요. 스태프들도 집 안에만 들어가면 너무 춥다고 하더라고요. 밤에 촬영하다가 제가 특수 분장을 하러 화장실 바로 앞의 골방 쪽에 들어가면 불이 꺼져있는데,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어요. 적산가옥이 훼손되지 않도록 저희가 진짜 조심하면서 촬영했는데, 바닥이 나무재질이다 보니 스태프 분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 촬영이 진행됐어요.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연기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극 중 김윤진이 주로 마주치는 인물은 최신부 역의 옥택연과 남편 철중 역의 조재윤이다. 미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극 속에서 최신부는 미희의 무고함을 유일하게 알고 해결책을 함께 강구하며, 철중은 아들 지원을 잃은 후 아들 효제와 미희에게 폭력으로 분노를 쏟아낸다. 옥택연과 조재윤의 상반된 연기 변신이 ‘시간위의 집’ 특유의 미스터리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여기에 박준면이 만신으로서 펼치는 그야말로 ‘신들린’ 연기 또한 영화의 놓칠 수 없는 관전 포인트다.
“옥택연 씨가 현장에서는 되게 장난기가 많아요. 최신부 역이라서 진지하고 묵직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극 중에서 최신부가 처음 미희 집을 방문하고 미희가 무시하면서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최신부가 발로 문을 막는 장면이 있는데, 제가 실제 옥택연 씨를 보고 제안한 거예요.(웃음) (조)재윤 씨 장점은 순간적으로 몰입을 잘 한다는 거예요. 되게 웃기고 장난기가 ‘철철철철’ 넘쳐요. 무거운 장면을 찍을 때 꼭 한 번씩 웃겨주는데, 리프레쉬 역할을 잘 해줬죠. (박)준면 씨와는 ‘하모니’ 때 인연으로 친해졌어요. 대본을 보고서 이건 준면 씨가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준면 씨는 깊은 폭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톡 건드리기만 해도 파동이 큰 배우예요. 일단 소리가 좋고 신들린 디테일을 잘 살려줄 거라 생각했어요. 리딩하면서 처음엔 웃었는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아 됐구나!’ 싶었어요. 첫 테이크 때는 진짜 너무 무서웠어요. 조재윤 씨도 두 번 놀라더라고요.(웃음)”
‘시간위의 집’ 속 상황처럼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묻자 “그런 순간이 분명 있겠죠.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없는 거 같아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지금의 노하우를 그대로 가지고 과거로 갈 수 있다면 좋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못 하잖아요. 그게 가능하다면 서른 살로 돌아가고 싶어요. 20대 때는 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는데, 30대 초반부터 스스로를 챙길 줄 알게 된 것 같아요. 그 때가 미적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능성이 무한한 나이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지금의 제가 훨씬 좋아요. 훨씬 성숙하고 나은 사람 같아요.”
1996년 MBC 드라마 ‘화려한 휴가’로 데뷔해 ‘쉬리’(1998), ‘밀애’(2002) 등으로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김윤진은 2003년 미국 드라마 ‘로스트’ 출연으로 화제 몰이를 하며 안정적인 연기력을 입증하곤 해외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이에 들뜨지 않고 다시 한국 영화 ‘6월의 일기’, ‘세븐 데이즈’, ‘하모니’, ‘이웃사람’, ‘국제시장’으로 국내 관객들을 꾸준히 찾음과 동시에 다시 미국 드라마 ‘미스트리스’ 시리즈의 주연 자리를 꿰차며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부지런히 활약 중이다. 현재 김윤진의 연기 철학은 무엇일까.
“‘하모니’를 함께한 나문희 선생님처럼 진짜 꾸준히,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아 영화네’라는 소리가 나오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하모니’ 장면 중에 나문희 선생님께서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시는 듯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영화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직은 제 욕심이죠. 주름살이 보이는 것도 배우라고 생각해요. 해보고 싶은 캐릭터는 악역이요. 꿀밤 제대로 먹이고 싶게 욕 나올 정도의 악역이요. 제가 정직한 목소리라는데, 이런 목소리로 사기를 치면 또 재미있을 거 같아요.”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