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실장급 채용 공모에 지원했던 A씨는 기금운용본부의 처우에 깜짝 놀랐다. 글로벌 사모펀드에서 잔뼈가 굵은 그에게 국민연금공단(NPS)은 세계 3대 연기금으로 큰손이었지만 기금운용 인력에 대한 처우는 신생 사모펀드보다도 못했다. A씨는 “559조원의 기금을 운용한다는 경험 외에 NPS에 들어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기금운용 인력들의 사기 저하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주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다시 실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최고 가치는 2,200만 가입자에게 높은 수익을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투자전문가는 국민연금에 오지 않고 고액자산가를 위한 사모펀드로 간다. 수익률만 잘 내면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에 고액 연봉이 마땅치 않다고 질타하는 사이 국민 노후자금의 수익률은 떨어지고 있다.
◇어설픈 공공성에 경직된 투자 포트폴리오=현행법은 국민연금이 기금운용 과정에서 수익률을 지상과제로 좇도록 규정했지만 운영은 행정부가 통제하고 가입자인 국민 대표가 권한을 행사한다. 완전히 행정부 산하에 둔 채 시장 투자를 금지한 미국 식도, 철저히 수익률을 추구하는 캐나다 식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다. 오히려 행정부가 연기금 운용에 개입해 실패한 일본 식을 따라간다. 그런 일본도 아베 신조 정권 이후 기금운용에 민간 전문가를 영입해 수익률 회복에 나서고 있다.
국민연금은 공기업 중 정부의 통제가 강한 준정부기관으로 연봉 수준은 투자은행 등 동일 업종의 같은 경력자에 비해 낮고 투자운용 과정에서 일일이 보건복지부와 기획재정부의 승인을 받는다. 국회와 감사원도 국민연금 기금의 운용 계획과 결과를 매년 수시로 감시한다. 지난 2월 기재부는 기금운용평가단 워크숍을 개최하며 국민연금 기금운용에 대해 ‘현미경’ 평가를 하겠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투자운용 성과를 평가할지 구체적인 계획도 내놓지 않았다.
국민연금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오는 2021년까지 기금본부는 국내 주식 20%, 해외 주식 25%, 국내 채권 40%, 해외 채권 5%, 대체투자 10% 이상을 계획하고 있다. 그나마 몇 년 새 국내 자본시장에서 국민연금의 역할론이 커지며 주식의 비중이 커지고는 있지만 규격화된 포트폴리오를 벗어나지는 못 한다.
◇투자전문가 4년도 못 버틴다=기금운용본부 운용역의 규모는 220명 정도다. 반면 이들을 평가하기 위해 교수 등 외부 위원회만 10여개, 200여명에 이른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이 같은 근무여건 때문인지 실제 자금을 굴리는 직원 면면을 보면 업계 최고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김순례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민연금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으로 206명의 경력직 기금 운용역 가운데 해외 금융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10% 미만으로 나타났다. JP모건 등 해외 유수의 증권사에서 온 사례는 한 손에 꼽을 정도고 대부분 국내 중견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연기금 및 보험사 자산 운용역, 일반기업 재무 담당자를 지냈다. 연차가 낮은 경력직이라고 하지만 연기금 투자와 거리가 있는 은행 여신 담당자나 카드사 개발팀 소속도 있다.
그나마 기금운용본부 근무의 유일한 장점은 대규모 기금을 운용했다는 경력이다. 이 때문에 기금운용본부에서 4~5년간 근무했다가 업계로 빠져나가는 직원이 늘어나는 추세다.
전주 이전은 인력 유출을 심화시켰다. 10년 차 팀장급을 포함해 40여명의 운용인력이 빠져나갔다. 기금운용본부는 이달 새로 30명을 뽑는 절차를 마무리했지만 기대 이하의 지원자가 몰렸다는 게 자체 평가다.
인력 유출의 결과는 수익률로 나타난다. 2012년부터 4년간 국민연금이 직접 운용한 수익률이 외부에 맡긴 수익률보다 항상 낮았다. 이 기간 국민연금의 직접운용 수익률은 2.5~6.7%에 불과했지만 위탁운용 수익률은 5.9~7.8%로 높았다.
◇자율 주고 책임 묻는 구조로 바꿔야=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목표를 수익률 하나를 놓고 자율성을 주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독립화와 전문화는 2003년 노무현 정부 때 시작해 박근혜 정부까지 추진했다. 그러나 결실은 없었다. 행정부에서는 소관 부처를 어디에 둘지를 놓고 기재부·복지부·국무총리실로 우왕좌왕했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국민연금의 전문성보다 사회적 책임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수익성을 강조하면 마치 공공성을 해치는 것처럼 여기는 풍조도 팽배해졌다.
연기금 관계자는 “지금은 국민연금 안팎으로 감시는 많지만 잘못이 일어났을 때의 책임 소재는 불분명하다”면서 “새 정부가 국민연금 개편을 논의할 때 수익률이 공공성과 직결된다는 사회적 합의를 한 뒤 지배구조를 단순화하고 최고의 전문가를 데려올 수 있는 인센티브가 마련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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