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대선후보 2차 TV토론을 지켜보던 기획재정부 세제실의 한 고위관계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법인세 실효세율 인상, 또 과표 500억원 이상 대기업의 명목세율 인상 등 증세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대목에서였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문 후보는 법인세 실효세율 인상 후 안 되면 명목세율 인상을 주장해왔는데 갑자기 명목세율도 인상한다고 해 당황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문 후보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24일 서울경제신문이 여론조사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문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의 구두공약, 공약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게재한 ‘10대 공약’ 등을 분석한 결과 후보들이 공약을 바꾸는 사례가 여럿 발견됐다.
우선 이날 345쪽 분량의 공약집을 발간한 안 후보는 사립유치원 행사에서 “대형 단설유치원 설립을 자제하겠다”고 했다가 30~40대 주부 표가 대거 이탈하자 공약집에서 빼버렸다. 법인세도 유세과정에서 실효세율을 올린 후 명목세율 인상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역시 공약집에서 재원조달 방안을 설명하며 ‘법인세 최고과표구간 신설 등’이라고 표기해 처음부터 명목세율을 인상하는 방안을 시사했다.
문 후보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소득세 최고세율 구간 신설”을 주장해왔지만 마련 중인 공약집에는 새로운 구간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현재 최고세율인 40% 적용 대상을 과표 5억원 이상에서 3억원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을 것으로 전해졌다. 최고세율을 추가로 올린다고 해도 들어올 세수가 적을 것으로 보이자 공약을 수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2015년 귀속 기준 과표가 3억~5억원인 근로소득자는 약 1만3,000명이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모든 공약을 상세하게 담은 공약집이 일찌감치 나와야 말 바꾸기도 못하고 정책선거가 이뤄질 텐데 공약집을 내지 않거나 선거에 임박해 내고 있어 유권자는 후보자의 정확한 공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투표를 할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구두공약과 명문화된 것을 비교한 결과 특히 복지 부문의 말 바꾸기가 심했다. 복지만큼 표를 끌어올 만한 달콤한 말이 없어 유세과정에서 약속은 했지만 막상 실행하려 하니 막대한 돈이 들어갈 것으로 보이자 공약집 등 명문화된 공약에서는 슬그머니 빼는 식이다.
문 후보의 경우 구두로 “중소기업이 정규직 2명을 채용하면 세 번째 인원부터는 국가가 임금을 3년간 전액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선관위에 등록한 ‘10대 공약’에는 관련 항목이 빠져 있다. 중기 임금을 대기업의 8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역시 10대 공약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 임금의 40%인 육아휴직급여를 3개월간은 80%로 2배 인상, 4개월째부터는 50%로 올리는 안을 구두로 밝혔지만 10대 공약에 ‘최초 3개월 2배 인상’은 포함된 반면 4개월째부터 50%로 인상하는 안은 빠졌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하는 공약도 수치 없이 ‘중장기 방안으로 추진’이라고만 돼 있다.
안 후보도 만만치 않았다. 구두로 전 국민 암 검진 무료, 연간 의료비 100만~500만원만 개인 부담이라고 공약했지만 24일 나온 공약집에는 암 검진 무료만 표기돼 있고 의료비는 ‘부담 경감’이라고 뭉뚱그려놓았다. 육아휴직급여를 최초 3개월간 임금의 100%로 지급하겠다는 공약, 최저임금을 오는 2022년까지 1만원으로 인상하는 안 등은 선관위 10대 공약에서 빠졌다가 공약집에는 다시 포함되는 등 오락가락하는 행태를 보였다. 박사급 과학연구인력 4만명, 4차 산업혁명 전문가 10만명 양성을 공약하기도 했지만 공약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고 규제프리존법 통과 역시 공약집에 없다. 이와 함께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와 관련해서도 입장을 바꿨다. 지난해에는 반대했지만 최근 보수표를 의식한 듯 찬성으로 돌아서더니 공약집에는 다시 ‘사드 배치 후 북핵 문제 해결이 진전되면 배치 철회 검토’라고 한발 물러섰다.
전문가들은 말 바꾸기를 줄이고 유권자가 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정책선거를 치르려면 모든 공약을 상세하게 담은 공약집은 선거를 넉넉히 앞둔 시점에 내는 것이 필수라고 보고 있다. 이광재 사무총장은 “유럽 등 서구 선진국은 선거까지 늦어도 두 달을 앞둔 시점에 공약집을 발간해 말 바꾸기를 방지하며 비난받을 공약이면 책임을 지고 좋은 공약이면 호평을 받는 절차를 거친다”면서 “우리는 구두로 일단 공약했다가 반발이 커지면 몰래 철회하는 주먹구구식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선거 공약은 국민과의 계약인데 제대로 된 계약서(공약집)도 만들지 않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6일 심상정 정의당 후보, 이날 안 후보가 공약집을 냈지만 대선을 불과 약 2~3주 앞둔 시점이다. 문 후보는 작업 중이지만 아직 내지 않았고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냈지만 완성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내지 않고 있다. 선관위에 10대 공약을 제출했지만 길어야 20쪽 분량으로 한 나라 대통령의 정책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세부내용도 부실하다.
18대 대선 때도 선거를 약 열흘 앞둔 시점에 당시 박근혜 후보가 397쪽, 문재인 후보가 153쪽짜리 공약집을 ‘벼락치기’로 발간한 바 있다. 이는 공직선거법에 공약집 발간을 비롯한 모든 공약 발표가 의무가 아닌 선택사항이기 때문이다. 후보들은 이를 악용해 공약집을 내지 않는 실정이다. 섣불리 발간하면 상대 후보에게 약점만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이태규·서민준기자 나윤석기자 class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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