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던 신기술이 나오는 과정에서 기존 법과 규제가 이를 담아내지 못해 발생하는 ‘규제지체’ 현상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규제지체를 해결하는 태도와 방식은 사뭇 다르다. 미국은 기업과 정부, 그리고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는다. 반면 한국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규제를 틀어쥐고 있고 정치권은 이를 중재할 수 있는 능력과 관심이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일례로 소비자가 직접 의뢰해 자신의 유전정보를 확인하는 ‘DTC(Direct-To-Consumer) 유전자 검사’ 서비스가 도입되는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지난 2006년 문을 연 미국의 개인 유전정보 검사 기업 ‘23앤드미(23andMe)’는 의사를 거치지 않고 소비자로부터 직접 타액 샘플을 받아 질병과 약물 순응도 등 약 250여개의 유전정보를 단돈 99달러에 제공하는 신개념의 서비스를 선보이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편리하고 값싸게 자신의 유전정보를 확인, 다양한 건강관리에 활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고객들은 열광했고 ‘23앤드미’는 창업 7년 만에 약 47만명의 유전정보를 확보할 정도로 빠르게 사업을 확장해갔다.
그러나 2013년 11월 미국의 보건당국인 식품의약국(FDA)이 ‘23앤드미’의 서비스에 대해 ‘판매 중지’ 결정을 내리며 상황은 반전됐다. FDA는 개인 유전 검사 서비스의 판매 및 이용 행태 등을 확인한 결과 소비자들이 이 검사를 의료진단과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높기에 검사의 정확도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봤다. 즉 의료기기에 걸맞은 엄격한 검증과 허가를 받지 않으면 판매할 수 없다고 결정한 것이다.
법과 규제에 발목이 묶이는 듯 보였지만 시장은 다시 반전을 맞는다. ‘23앤드미’와 FDA, 그리고 정치권은 신개념의 서비스를 검증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고 기준을 하나씩 만들어갔다.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양측이 동의한 기준 아래 검증이 이뤄졌고 서비스의 판매 재개 결정이 속속 내려졌다. 회사는 FDA의 전면 판매 중지 결정을 받은 지 1년3개월 만인 2015년 2월 ‘블룸 증후군’이라는 유전질환에 대한 보인자(숨겨져 나타나지 않은 유전 형질을 지닌 사람) 검사를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테이색스 증후군 등 36가지 보인자로 검사 범위를 확장했다. 그리고 올해 4월 마침내 알츠하이머 등 질병과 관련된 위험도 예측 서비스도 허가받으며 원위치를 회복했다. 회사가 확보한 유전체정보는 최근 200만명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도 지난해 6월 ‘DTC 유전자 검사’ 서비스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사뭇 다르다. 국내의 경우 보건 당국이 허가한 유전자 검사에 한해서만 DTC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현재는 탈모·피부색소 등 질병과 관련 없는 42개 유전자, 12가지 항목만 가능하다. 이외에 특정 유전질환에 대해 99%의 정확도를 가진 검사를 개발한다 해도 국내에서 직접 판매는 금지된다는 의미다. 업계에서는 반발하고 있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꼼짝도 안 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함께 기존 규제로 담지 못하는 신기술은 점점 더 많이 나올 텐데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글로벌 격차가 점점 벌어질 뿐”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관계자 역시 “해외는 새로운 서비스에 대해 일단 문제가 없는지 지켜본 후 규제를 하는 네거티브(원칙 허용 예외 금지) 방식이지만 한국은 포지티브(원칙 금지 예외 허용) 방식이라 신기술에 맞는 법과 가이드라인이 생길 때까지 제품의 출시·판매가 거의 원천봉쇄되곤 한다”며 “정보기술(IT)이나 바이오 등 속도가 빠른 성장산업에 대해서라도 ‘규제 프리존’ 등을 검토하고 법과 제도를 탄력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김경미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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