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대형 핵 벙커 버스터 폭탄인 지하 견고 표적 관통 핵폭탄(Robust Nuclear Earth Penetator, 이하 RNEP) 프로그램을 취소했다. 그러나 얕은 지하 표적을 공격하기 위해 개발된 B61-11 핵폭탄은 계속 보유할 것이다(사진은 B61-11이 아님).
지난 4월 13일, 미 국방부는 동부 아프가니스탄의 동굴 속에 숨어 있는 ISIS(이슬람 국가) 병사들에게 대형 폭탄 MOAB을 사용했다. 이 동굴들은 지난 19세기에는 영국에 맞서 싸우던 현지 게릴라들이, 20세기에는 소련에 맞서 싸우던 무자히딘들이 숨어 살던 곳이다. 이 동굴들이야 말로 지난 수백 년간 외국 침략자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완전 정복하기 곤란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21세기 초 미국은 이 천연의 요새를 무력화시킬 신병기 개발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RNEP는 지진을 일으켜 동굴을 영구히 봉해버리기 위해 고안된 핵병기다.
지난 2005년 본지는 RNEP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냈다.
“올 가을 미 의회는 RNEP의 타당성 조사 완료에 필요한 예산 850만 달러의 승인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후원을 받는 과학 자문단인 미국 과학 한림원의 최신 보고서는 이 무기의 운명에 치명타를 먹일 수도 있다. 지난 5월에 발행된 이 150페이지짜리 보고서의 결론에 따르면, RNEP는 기존의 병기들보다 더욱 성능이 우수할 수도 있으나, 다수의 표적을 파괴하지 못할 수 있으며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킬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흙은 그 물리학적 특성상 두텁게 쌓으면 폭발물의 폭발력을 잘 막아낼 수 있다. 폭발의 물리적 힘은 점도가 낮은 흙, 즉 모래 알갱이를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때까지 밀어버린다. 이렇게 압축된 모래 알갱이들은 매우 단단한 층을 형성한다. 지하 방공호가 강한 이유는 이 원리 때문이다. 깊게 파들어 갈수록 그 속의 사람들을 더욱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RNEP는 레이더 센서를 사용해 탑재한 핵탄두가 지면 속 일정 깊이로 들어간 후에애 폭발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폭발력이 땅으로 전달된다. 따라서 리히터 규모 7 수준의 지진을 일으킬 수 있다. 폭발이 발생한 심도보다 300m 이상 더 깊은 곳에 방공호가 있지 않은 한 위험하다. 방공호 속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곤란한 일이다. 문제는, 해당 지역에 사는 민간인에게도 매우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본지의 2005년 기사를 다시 인용해 본다. “미국 과학 한림원의 예측에 따르면 이 폭탄의 폭발로 30만 톤의 방사능 폐기물이 발생, 고도 24km까지 뿜어져 올라갈 것이다. 발생하는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기상 조건이나 풍속, 폭심지와 거주지 간의 거리에 따라 100만 명을 초과할 수도 있다.”
RNEP는 분명 주어진 임무를 해낼 수 있는 무기다. 그러나 전술적 및 전략적 이득에 비해 비용이 너무 비싸다. 그리고 적군 뿐 아니라 폭격 지역의 민간인들에게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지난 2005년 4월 미국 과학자 연맹은 핵 벙커 버스터 개발에 반대하는 취지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다른 재래식 무기로도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므로, 핵 벙커 버스터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보고서 내용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핵병기는 이러한 임무들을 첨단형 재래식 무기들에게 하나둘씩 넘겨주고 있다. 그것은 군비 통제 협정이나 비핵 정책 때문이 아니라, 재래식 병기가 군사적으로 더욱 우월하기 때문이다. 물론 끝까지 재래식 병기에게 넘겨주지 못하는 핵병기만의 고유 임무도 2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적의 도시 전체를 소멸시키는 임무이고, 두 번째는 러시아의 전략 핵병기를 선제 공격하여 무력화하는 임무이다. 그러나 이 두 임무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라 핵병기 옹호론자들조차도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삼지 않을 정도다. 그렇다면 핵병기의 전술적 전쟁 임무 중 아직 재래식 병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지하 터널 공격뿐이다. 그리고 핵포탄과 핵폭뢰를 따라 이 임무가 사라진다면, <소규모의 억지력> 이외의 핵병기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핵병기 옹호론자들이 지면 관통 핵병기, 특히 RNEP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 말고는 실전에서 사용해 볼 수 있는 핵병기가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사용해 볼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지면 관통 핵병기를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사람의 손으로 매우 공들여 만들어진 지하 방공호를 공
격할 때뿐이다. 그러나 이런 무기들의 사용을 진지하게 검토할만한 작전 시나리오는 현재로는 없다.”
그리고 RNEP가 취소되어도 미국은 지하 표적을 공격할 수 있는 핵병기를 가지고 있다. 지난 1997년 개발된 B61-11은 탄체를 개량해 착탄 후 지하 6m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RNEP 프로그램에 대한 반대 여론은 널리 확산되었다. 의회는 물론 과학계에도 반대 여론이 널리 퍼지자 부시 행정부는 지난 2005년 RNEP 개발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06년도 미국 에너지부 예산에서 RNEP 관련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다.
현재 미 국방부는 쓸데없이 수백만의 민간인을 죽이지 않고도 핵병기와 같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재래식 병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대형 공중폭발탄 (Massive Ordnance Air Blast, MOAB)도 그 중 하나다. 이 폭탄의 폭발력은 소형 핵폭탄보다도 작다. 그러나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건물도 흔들 수 있다.
대형 관통 폭탄(Massive Ordnance Penetrator)도 또 다른 옵션이다. 2,700kg의 폭약이 충전된 이 폭탄은 스텔스 폭격기로 투하된다.
이런 병기만 있다면 미 국방부는 비 핵전 상황에서 거의 모든 표적을 공격할 수 있다. 또한 핵 공격에 비해 방사능 낙진이나 정치적 후폭풍도 적다.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편집부 / by Kelsey D. Athe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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