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국내산 제품에 대해 갈수록 통상압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국내 기업은 속수무책 상황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개별 기업이 대응하기에는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가 너무 거세 힘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에는 국내산 철강제품이 주로 미 정부의 견제 대상이 되더니 한미 정상회담 전후로는 국내 화학업계가 타깃이 된 형국이다. 지난 5월에는 ‘결정질 실리콘 태양전지’의 세이프가드 조사가 시작됐고 5월 말 합성 단섬유, 지난달에는 저융점 폴리에스터 단섬유에 대한 반덤핑 조사가 개시됐다. 이 중 합성 단섬유는 한 달여 만에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미국 내 기업에 피해를 준 사실을 인정하는 반덤핑 예비결정을 내리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미 정부의 규제 조치에 대해 해당 기업이 대응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업계에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올 들어 벌어지는 미국의 수입규제가 보호무역 강화라는 큰 틀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때문에 개별 기업 차원의 대응에 대해 ‘효과가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 10년 동안 화학제품이 미국에서 반덤핑 제소를 받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최근 1년 동안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라며 “미국이 보호무역을 강화하려는 모습이 뻔한데 과연 수억원씩 사용하면서 방어하는 게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반덤핑 제소를 당한 한 업체는 대응 수위를 놓고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해당 제품의 매출 비중이 미미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최근 다른 제품에 대한 조사가 잇달아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피해가 더욱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내에서 생산하는 화학제품이 다양하다는 것도 기업의 대응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미국에 수출하는 주요 제품만 수십 종인데다 제품마다 주로 생산하는 기업이 모두 달라 해당 기업이 사례마다 대응할 경우 협상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모습은 화학업계뿐만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동차와 함께 ‘불공정한 거래(Deal)’의 대표 사례로 지목하고 있는 철강 역시 속수무책이다. 철강업계는 미국의 파상공세를 지켜보고 있을 뿐 마땅히 손 쓸 수 있는 수단이 없어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반덤핑·상계 관세율을 낮추기 위해 미국 정부의 연례 재심에서 입장을 적극적으로 알려 설득해보겠다는 정도다.
이런 와중에 미 상무부가 조만간 발표할 무역확장법 232조에 대한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철강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자국 안보를 이유로 수입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강력한 조항이다. 정부와 철강업계 통상 실무자들이 수시로 만나 대책을 논의하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은 나오지 않고 있다. 외국산 철강재 수입이 자국 안보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할 경우 232조에 따라 대미 수출이 아예 중단될 가능성도 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미 ICT 제소 등의 조치는 취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 조치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한국 정부가 미국의 강화되는 보호무역에 대해 포괄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협회 차원에서 대응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힘에 부친다”며 “결국 우리 정부가 나서서 미국에 요구할 것은 요구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성호·한재영기자 junpark@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