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8세기 후반.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을 쓸어낸 프랑크 황제 샤를마뉴에게 마지막 사라센 세력 사라고사가 항복 사절을 보냈다. 수레 50대에 실은 금화를 진상하며 기독교 개종까지 약속하는 이교도(이슬람) 왕의 간청에 샤를마뉴가 흔들렸다. 조카이자 충신인 롤랑은 거짓 항복이라고 반대했으나 황제는 간신배에게 속았다. 황제는 7년 원정을 끝내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군대의 후미는 롤랑에게 맡겼다. 롤랑의 예상대로 이슬람군은 뒤통수를 쳤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롤랑은 구원 신호인 뿔고둥을 길게 불고 장렬하게 전사한다.’
‘롤랑의 노래(the Song of Roland).’ 현존하는 프랑스 문학 작품 중 가장 오래된 무훈시(武勳時)다. 내용을 간추리면 위와 같다. 결말은 처절한 복수와 새로운 전쟁에 대한 암시. 2만여 병사로 40만 사라센 군대와 맞서 싸운 끝에 죽어가던 롤랑이 마지막 숨으로 불은 뿔고둥 소리를 들은 샤를마뉴는 급히 되돌아와 사라센 군대를 쳐부쉈다. 롤랑의 의붓아버지이며 황제의 매제(妹弟)이면서도 롤랑을 죽음으로 내몬 간신배 가늘롱도 처단했다. 모든 것을 끝내고 처소에 든 늙은 황제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와 새로운 명을 내린다. ‘이교도들이 포위하고 있는 앵프 성을 구하라.’
11세기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 퍼진 무훈시 ‘롤랑의 노래’는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부합할까. 죽은 자와 전투 일시만 맞고 나머지는 모두 허구 또는 왜곡에 가깝다. 먼저 사건의 진상을 보자. 서기 778년 8월 15일 피레네 산맥 근처의 롱스보 전투에서 샤를마뉴의 장군 롤랑이 전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롤랑의 군을 습격한 군대는 이슬람이 아니라 바스크족이다. 물론 당시 바스크족은 기독교화가 안 된 이교도인데다 이슬람과도 수시로 합종연횡하는 세력이었으나 이슬람은 아니었다. 샤를마뉴의 지위도 다르다. 교황 레오 3세를 보호해 준 대가로 ‘서로마 황제’ 칭호를 받은 799년 크리스마스 이전까지는 프랑크 국왕이었다.
롱스보 전투에 동원된 군대 규모도 훨씬 적다.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는 롤랑 군 2만 명과 동료 장군 10명(샤를마뉴의 12기사 중 10명)이 후미를 맡았다고 나오지만 샤를마뉴의 군대는 약 3,000여 명. 바스크족 군대는 그 규모마저 불명확하다. 대단히 많았다고 전해질 뿐이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바스크 군은 샤를마뉴의 군대를 학살하다시피 무찔렀다. 가장 큰 왜곡은 7년간 원정에서 이슬람 세력을 거의 쫓아냈다는 설정. 샤를마뉴는 12년 동안 스페인에서 싸웠으나 스페인 전 지역은 고사하고 교두보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문학을 장려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 샤를마뉴지만 스페인 원정만큼은 기록조차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실패로 여겼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누가 롤랑의 얘기를 각색했을까. 아르놀트 하우저의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고대·중세편)’를 따라가 보자. ‘칼 대제(샤를마뉴의 독일어권 명칭)는 옛날 야만의 시대부터 민족 대이동 시기까지 각종 영웅담을 수집하고 기록하라고 명령했다. 성직자들은 이를 손질해 궁정문학·기사문학으로 발전하기 전에 승려문학으로 만들었다.’ 성직자들은 소속 수도원이나 교회에 보존된 유체(遺體)나 유물(遺物)이 보존된 영웅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사제들이 지어낸 이야기의 원형은 음유시인들을 통해 사방으로 퍼졌다.
민간의 속어 문학 속으로 흘러들어 간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졌다. 성백용 한림대 교수(역사교육과)의 연구논문 ‘십자군 시대 서유럽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인식과 담론의 유형들’에 따르면 전설과 무훈시가 대중에게 알려지며 종교적 편견과 맞물렸다. 스페인 지역에 침입해 눌러앉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반감이 ‘롤랑의 단순한 전사’를 ‘이교도에 맞서는 고결한 기사의 장엄한 죽음’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명저 ‘오리엔탈리즘’에서 롤랑의 노래를 ‘기독교들이 편협한 이슬람관(觀)’을 갖는데 기여한 작품으로 꼽았다.
‘롤랑의 노래’에는 종교와 정치도 숨어 있다. 마지막 장면을 되돌아보자. 늙고 지친 샤를마뉴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내리는 ‘앵프 성을 구하라’는 명령은 무엇일까. 앵프 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이다. 사건은 8세기 후반에 벌어졌지만 민간에게 널리 퍼진 시기는 11세기 초.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프랑스 중부도시 클레르몽에서 ‘이슬람과 싸워 예루살렘을 되찾으라’고 호소했던 1095년과 시기가 정확하게 맞물렸다. 결국 ‘롤랑은 기독교적 시각에서 용기와 충성의 상징으로 ’포장되고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이런 왜곡이 서구인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았다는 점에 있다. 하루 한 권씩 책을 읽고 서평을 내는 극한(極限)의 다독가(多讀家)이자 편집기획자로 유명한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의 저서 ‘知(지)의 편집공학’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프랑스어가 생기고 나서 롤랑의 노래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 롤랑의 노래가 프랑스어를 만들었다.’ 언어가 존재해서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니라 이야기를 편집하고 각색하는 과정에서 언어 규칙이 확립됐다는 것인데 정녕 그렇다면 오싹하다. 습성과 구조로 굳어진 왜곡은 고치기 어려우니까.
롤랑의 노래에는 서구 특유의 자부심이 묻어나온다. 1066년 영국을 침공했던 노르망디공 윌리엄의 군대도 전투 직전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구호 ‘기독교는 언제나 옳고 이슬람은 나쁘다’를 반복하며 전의를 가다듬었다고 한다. 샤를마뉴의 신격화와 십자군 전쟁 동원 극대화를 위한 날조였지만 롤랑의 노래는 세계사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대항해를 통한 해외진출, 제국주의 침탈에까지 롤랑이 스며 있다. 미주대륙은 신이 백인에게 준 선물이라는 ‘명백한 운명(1845년)’과 서구인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는 키플링의 ‘백인의 책무(1899년)’, 황인종의 발흥을 막아야 한다는 러시아 차르의 ‘황화론(1895년)’까지 모두 ‘롤랑의 노래’의 변형 판이다‘.
롤랑의 노래’가 더 울려 퍼질 수 있을까. 어렵다. 20세기 초반까지 서구 기독교인이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육박했지만 요즘은 13%대로 주저앉았다. 그런데도 서구는 부와 자원을 여전히 독과점한다. 종교 갈등도 해묵은 과제다. 최근 미국에서는 우려했던 게 터졌다. 백인 극단주의자들이 집단 시위를 벌이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별다른 경고를 보내지 않았다.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롤랑의 뿔고둥’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그래도 어둠이 깊으면 해가 뜨기 마련이다. 광복절의 아침이 밝았다. 오래된 허구로 굳어진 왜곡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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