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은 한마디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코끼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코끼리를 말로 설명해주고 그리라고 하면 다양한 그림이 나올 것이다. (중략) 하지만 코끼리를 보여주며 그리라고 하면 비슷한 그림만 나오지 않겠는가.” (‘상상, 현실이 되다’ 중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내 소프트웨어 전문가가 쓴 미래 전망서 한 권을 접한다. 상상에서 출발한 것들이 기술로 만들어지고 미래 비즈니스로 연결된다는 내용에 감동 받은 문 대통령은 저자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고 20대 총선에서 열한 번째 인사로 영입한다. 아쉽게 낙선했지만 대통령은 그를 잊지 않고 4차 산업혁명을 책임지는 부처의 수장으로 발탁했다. 그가 유영민 장관이다.
지난 6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수장으로 낙점된 후 유 장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부의 정보기술(IT) 정책은 미래 먹거리·일자리를 만드는 드라이버 역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래사회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현장을 중심에 두고 소통하겠다는 그의 다짐에 업계에서는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기본료 폐지’를 내건 대선 공약,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통신비 인하안 발표, 약정할인율 인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과기정통부의 ‘일방통행’ 식 행보에, ‘소통’을 외치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장관의 태도에 업계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통사들은 정부가 근거 없이 통신비 인하를 밀어붙인다며 볼멘소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구매력평가 환율(PPP)’을 기준으로 한 이통요금 분석자료에 의하면 한국 요금은 OECD 평균보다 15~40% 저렴하다. 음성과 데이터를 적게 쓰는 군에서는 34개국 중 여덟 번째로 낮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통3사가 4조원에 달하는 영업이익, 그 두 배에 달하는 마케팅 비용을 지출한다는 이유로 여력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양측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자 정부는 행정처분을 단행했고 이통사들은 행정소송을 검토 중이다.
기초수급자 등 통신비 인하에 따른 편익이 큰 계층에 대한 통신비 인하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월 2,000원 안팎의 통신비 추가인하(선택약정 적용 시)가 일반 소비자에게 얼마나 와 닿을지는 의문이다. 앞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단행한 통신비 인하 정책을 체감했다는 소비자가 64.7%에 그친다는 시민단체의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한계는 명확히 드러난다. 오히려 미래 먹거리를 위해 손을 맞잡아야 할 정부와 업계 간에 쌓이는 불신이 더 큰 실기(失機)가 아닐까.
문 대통령은 22일 유 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다. 보편요금제 출시 등 정부 개입이 불가피한 정책이 줄줄이 대기 중인 상황이다.
유 장관에게 묻고 싶다. 혹여 대통령이 보여준 코끼리 그림에 매달리는 건 아니냐고, 그래서 다른 코끼리는 상상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장관의 믿음대로 ‘상상이 현실이 되기 위해선’ 기존 체제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창조적 적용이 전제돼야 한다. 통신비 인하 역시 기존 정권과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유 장관이 ‘대통령의 코끼리’와는 다른 코끼리를 상상해낼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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