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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집단화…삼국협상, 삼국동맹





1907년 러시아 페테스부르크. 영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협약을 맺었다. 알렉상드르 이즈볼스키 러시아 외무장관과 아서 니콜슨 주러시아 영국 대사가 맺은 영·러 협상(Anglo-Russian Convention)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 먼저 양국은 티벳에 대한 중국 종주권을 인정하되 영토는 보전한다는 데 합의했다. 티베트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 러시아 두 나라가 싸우지 않겠다는 의미다. 둘째는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갈등 조정. 러시아가 먼저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세력권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대신 영국도 아프가니스탄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문구를 넣었다.

세 번째는 이란 갈라 먹기. 북부는 러시아, 남부는 영국이 각각 세력권으로 삼되 중간 지역은 완충 중립지대로 놔두자는 데 합의했다. 영·러 협상은 국제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두 나라는 흑해에서 중앙아시아, 심지어 한반도에서도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력 다툼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한 영국에 대한 러시아의 감정이 풀어지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예측도 빗나갔다. 무엇이 두 나라로 하여금 동맹에 버금가는 관계를 맺게 만들었을까. 독일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서다. 영국과 러시아 간 협약 체결로 프랑스까지 포함해 독일에 대응하는 ‘3국 협상(Triple Entente)’이 비로소 완성됐다.

크림전쟁(1853~1856)에서 서로 싸웠던 영국·프랑스와 러시아가 ‘3국 협상’ 체제로 묶이기까지는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먼저 프랑스와 러시아가 먼저 손잡고 1894년 러·불 협상을 맺었다. 러시아는 프랑스가 독일이나 독일의 지원을 받는 이탈리아의 공격을 받을 경우 참전하고, 프랑스는 러시아가 독일이나 ·독일의 지원을 받는 오스트리아로부터 공격 받을 경우 참전한다는 게 그 내용. 전황이 변해도 단독으로 강화하지 않는다는 문구도 넣었다. 말이 협상이지 상호방위조약이나 다름 없는 준 군사 동맹의 성격이 강했다.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 ‘협상’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삼국협상의 두 번째 퍼즐인 영·불 협상이 맺어진 시기는 1904년. 독일이 그 동력을 제공했다. 먼저 영국은 함대법을 만들며 영국 해군과 맞서려는 독일이 견제할 필요를 느꼈다. 마침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으려는 프랑스에 독일이 반대하고 나선 상황. 백년전쟁 이래 쌓인 원한을 18세기 초 7년 전쟁과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서 재확인하며 견원지간(犬猿之間)으로 보내던 두 나라는 식민지 영역 조정 차원에서 협상을 맺었다. 프랑스는 모로코에서, 영국은 이집트에서 우월적 지위를 갖는다는 점을 서로 인정하고 태국을 양국의 공동 세력 범위로 확정한다는 게 영·불협상의 골자.

프랑스와 러시아,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와 영국이 각각 맺은 ‘협상’ 관계는 그 동기와 협력의 수준이 제각각이었으나 곧 군사 블록(Block)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강력한 상대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이라는 끈으로 묶인 상황.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대립 속에 유럽의 긴장은 날로 높아졌다. 흥미로운 대목은 애초에 러시아는 독일과 같은 진영이었다는 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이겨 통일제국을 출범(1871)시킨 독일은 프랑스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1873년 삼제동맹(三帝同盟)을 맺었다. 유럽의 국경선 유지와 국내 사회주의자 탄압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등 ‘황제국’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대내적으로는 공산 혁명 가능성 배제,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이 목적이었던 삼제동맹은 효력이 오래가지 못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가 안 좋지 않았다. 발칸 반도를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는 갈수록 벌어졌다. 결국 삼제동맹은 만기가 찬 1887년 소멸되고 말았다. 두 번째 이유는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의 실각. 비스마르크는 삼제동맹이 깨지자마자 러시아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침 조약의 일종인 ‘재보장조약’을 맺었다. 군사 동맹이 가까스로 유지된 셈이다.



그러나 외교를 중시하는 75세의 노수상을 1890년 내보낸 젊은 황제 빌헬름 2세(당시 31세)는 비스마르크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재보장조약의 시한이 돌아온 1890년 러시아는 갱신을 원했으나 젊은 황제는 이를 무시해버렸다. 프랑스는 독일과 러시아 간 벌어진 틈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삼국 협상’의 첫째 단추인 ‘러·불 협상’(1894)이 이렇게 태어났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보인 해외 팽창 정책은 각국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고 결국 삼국협상 체제로 이어졌다.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으로 화가 난 이탈리아를 설득해 1882년 결성한 ‘삼국 동맹’ 체제에 필적할 수 있는 ‘삼국협상’의 태동은 피를 불렀다. 세계 제 1차대전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눈 여겨 볼만한 대목은 국제적 긴장과 대립이 심화할 때 영국과 독일이 최소한의 긴장 완화 노력은 기울였다는 점이다. 끝내 불발되고 말았지만 4년 동안(1908~1912) 해군 군축 회담을 지속하고 독일의 바그다드 철도 건설을 통한 중동 지역 진출도 최소화하는데도 이견을 좁혔다. 나름대로 대화를 지속하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 중인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총에 암살된 이후, 세계는 비이성적 판단으로 빠져들었다.

당한 입장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한 지 불과 보름 동안 세계 각국이 순차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영국과 독일의 대화 분위기는 집단적 광기에 막혀버렸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세르비아 간 전쟁으로 머물렀을 전쟁이 너도나도 참전하는 통에 미증유의 세계대전으로 변했다. 초 가을 전쟁에 소집된 병사들은 ‘찬 바람이 불면 평상시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1,450일을 적의 총알이 빗발치는 참호 속에서 견뎌야 했다. 길게 보면 40년 동안 이어진 ‘협상’과 ‘동맹’의 군사적 대립’이 전세계 32개국이 전쟁이 뛰어드는 최초의 세계대전을 낳은 셈이다.

최초의 세계대전은 인류가 경험한 그 어떤 전쟁보다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군인 전사자만 약 991만명에 실종자 775만명. 민간인도 225만명이나 죽었다. 돈도 많이 들었다. 1913년도 불변 가격으로 2,008억 달러가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1차대전 종전 이후 20년 만에 더 큰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인명과 재산 손실 규모는 더욱 컸다. 당시에도 지구촌의 대부분 국가가 나라 단위보다는 진영에 속해 싸웠다. 오랜 기간을 적대시하며 싸움 준비를 하는 진영은 결국 싸우게 되는 걸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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