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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안상수 "옷 짓고, 밥 짓고, 집 짓듯...디자인은 멋 부림 아닌 멋을 짓는거죠"

안상수 시각디자이너

과거 글씨로 사람 판단하듯

지금은 글꼴로 개성 드러내

지나친 기계화 반작용으로

손글씨에 대한 욕구 커질것

디자인 교육 대안학교 '파티'

무경쟁·무재산·무권위 지향

자유로운 환경서 창의 모색





월요일 오후쯤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신저로 답신이 돌아왔다.

“달날은 어려워요. 물날이 좋겠어요.…낮밥 이후로는 다른 일이 있어서 10시가 좋아요.”

그는 월요일을 달날, 수요일을 물날이라 했고 점심식사를 낮밥이라고 불렀다. 사각 틀을 벗어난 혁신적 글꼴 ‘안상수체’ 등 멋지고 세련된 글자체로, 기발한 시각예술로 한글을 풀어내는 타이포그래퍼(typographer) 겸 시각디자이너 안상수(65)와 약속 시간을 정하는 과정은 이랬다.

“집에서 만나요, 파주 날개집.”

경기도 파주에 집이 있나 헛갈렸지만 파주는 홍익대 정년퇴임에 즈음해 안상수가 설립한 디자인 전문의 독립학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ju Typography Institute·PaTI·이하 파티)가 있는 곳이다. ‘날개’는 시인 이상을 흠모한 안상수의 자호(自號)지만 배우는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의미를 담아 ‘교장’을 뜻한다. 즉 ‘날개집’은 교장 연구실 정도로 풀이된다. 그렇게 날개 안상수와 물날 이른 아침에 만났다.

상하의가 붙은 점프슈트, 일명 작업복을 입고 머리에 착 달라붙은 비니를 쓴 안상수. 강연장에서, 전시장에서, 심지어 길가다 우연히 만났을 때도 그는 늘 같은 차림이었다. 분명하면서도 한결같은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멀리서도 그를 알아본다. 문자가 일관성 있는 사회적 약속으로 통용되듯 안상수는 스스로의 외양을 디자인한 셈이다. 홍익대 디자인학과 교수로 발령 나던 날 꽤 길었던 머리를 잘랐고 짧은 머리로 교직에 있던 그는 지난 2012년 정년퇴임 다음 날부터 작업복(만)을 입었다. 외양을 바꿔가며 신분 변화에 의미를 부여했다.

“예전에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있을 때 학교 내 화방에 작업복이 잔뜩 걸려 있던 게 우리나라 화방에서 앞치마를 파는 것과는 달라 인상적이었어요. 아무 데나 털썩 앉을 수 있고 허리춤 드러날까 신경 쓰이지도 않는 이 점프슈트가 작업할 수 있는 몸가짐을 만들어주니까 실제로 미술학교에서는 더 기능적이죠. 파티에 입학하는 배우미(학생)들 모두에게 이것과 똑같은 점프슈트가 지급됩니다.”

안상수는 선생님·교수님 같은 호칭 대신 ‘날개’로 불러달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은 (동명의 다른 유명인 때문이 아니어도) 그를 ‘안상수체의 안상수’라 부르곤 한다. 1985년 안상수가 완성한 글꼴 ‘안상수체’는 네모 틀 안에 반듯하게 적는 것이 ‘옳은’ 줄로만 알았던 한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다. 훈민정음의 한글 창제원리에 충실하게 초성과 종성 크기를 같게 맞춘 것이건만 처음에는 기존 사각 틀의 기준에서 아래 혹은 옆으로 삐져나오는 글씨체가 어색하게 여겨졌다. 동그라미와 직선뿐인 글꼴인데도 개발 회사가 제작에 난색을 표했을 정도다. 그러나 ‘안상수체’는 다른 어떤 글꼴보다 멋있고 자유로운 느낌으로 사용자를 파고들었다. ‘탈(脫) 네모틀 글꼴’의 선구자인 그에게 물었다. 디자인이 뭡니까.

“나는 디자인을 ‘멋지음’이라 부릅니다. 멋을 짓는다는 뜻이죠. 여기서 ‘짓다’라는 동사가 중요해요. 옷도 짓고 밥도 짓고 집도 짓죠. 의식주 모두가 짓는 것입니다. 죄도 짓고 시(詩)도 짓고 업까지 ‘짓는’ 것이거든요. 멋이라는 감각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멋의 범주에서 보자면 촌스러운 것까지도 멋이 됩니다. 멋을 부리는 게 아니라 멋을 짓는 게 디자인입니다.”

디자인은 문화예술부터 산업까지 우리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어쩌면 디자인이 외래어라 막연한 의문이 드는지도 모르겠어요. 모국어로 받아들이면 어렵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직업이나 전문성을 학력과 결부시키는 사회 인식과 연결됩니다. 디자인을 배우지 못한 우리네 어머니들도 ‘멋지음’의 측면에서 본다면 부정하고 싶은 촌스러운 대상이 아니라 ‘참 괜찮은 디자이너였구나’라며 포용하게 되지요.”





한편 과거에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해서 인물을 평가할 때 외모는 물론 말씨와 글씨·판단력 등을 따졌지만 지금은 메신저가 대화를 대신하고 컴퓨터 타이핑과 스마트폰 자판으로 글 쓰는 일이 허다하니 가늠의 기준이 달라지게 됐다. 손글씨 대신 글꼴로 나름 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글씨로 사람을 보듯 글꼴만으로 북에서 발행된 것인지 남에서 만든 것인지도 알지요. PC의 상용화로 용도에 따른 글꼴은 더 개발될 테고 그 특징과 기능은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세종임금께서 한글을 ‘멋지은’ 이후로 지금처럼 글꼴이 다양한 시절은 없었으니 ‘한글의 르네상스’라 해도 과언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손으로 쓰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지는 것을 느낄 겁니다. 지나친 기계화 이후에는 손으로 하는 예술이나 서예·손글씨를 갈구하는 ‘본능적 평형감각’이 작동할 겁니다.”

‘안상수체’에 이어 최근에는 그가 세운 대안학교 ‘파티’가 주목받고 있다. 파티는 정년퇴임을 앞둔 안상수가 2012년 설립한 디자인학교로 올해 14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9년 바이마르에 설립돼 독일 디자인 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친 ‘바우하우스’처럼 파티는 기존 교육정책의 틀 속에서는 구현되기 어려운, 삶과 밀착된 디자인 교육을 실천하는 학제 밖 대안적 독립학교이자 교육 협동조합이다.

“내가 살아온 길 중 하나가 실무디자인, 또 하나가 학교였기에 그 둘을 합해 학교를 디자인하는 것이 예순 이후 삶에서 내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죠. 무경쟁·무재산·무권위를 지향하는 파티는 학위가 없는 학교입니다. 애지음(창의)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태어납니다. 그러한 교육 환경을 만들어내는 시도, 참 쉽지 않지만 그것이 파티라고 할 수 있어요.”

파티에서 학생은 ‘배우미’, 교수는 ‘스승’, 부교장은 ‘버금’, 연구소 소장은 ‘마루’, 주임은 ‘기둥’이라 불린다. 디자인학교도 ‘멋짓 배곳’이라 하고 대학원은 더 배운다는 뜻에 ‘더배곳’이라 한다. 주시경이 쓴 단어인 ‘배곳’은 학교를 뜻한다. “어떤 말을 쓰느냐에 따라 관점이나 태도가 달라지기에 말에 묻어 있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고자” 한 날개(교장)의 의지다.

“파티에서는 손과 몸을 많이 쓰게 합니다. 몸 자체가 이미 우주인데도 그간 몸을 억압하며 경시했고 몸 밖의 물질이나 지능을 우대하는 것이 지금의 문화 흐름이지만 미래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안이 미래입니다. 대안이 많을수록 미래에 대한 선택지가 많아지니까요.”

최근 권위 있는 디자인 전문잡지가 선정한 ‘주목할 젊은 디자이너 10명’ 중 2명이 파티 졸업생이었고 공모로 뽑힌 2018 평창동계올림픽 예술포스터 주인공도 배출했다. ‘1등’이나 ‘당선’ 등을 겨냥한 교육철학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생겨난 ‘힘’이 있었다.

“바우하우스는 국가적 프로젝트였지만 파티는 조합원 개인들의 꿈이 모여 빈손으로 시작한 것이라 많이 다릅니다. 파주출판도시 전체를 캠퍼스로 여기며 주변의 지역 인프라를 활용하고 있는데 앞으로 커나가기보다는 살아남아서 어떻게 역사적 콘텐츠가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역사가 되는 게 꿈이죠.” 서리 내린 듯한 흰 머리가 무색할 정도로 그는 꿈꾸는 소년이었다.

/파주=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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