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계올림픽을 발판으로 한반도 위기관리의 실마리를 잡은 문재인 대통령이 북미대화 여건 마련을 위한 전력질주를 준비하고 있다. 여건 마련의 열쇠가 될 ‘비핵화’ 방식과 관련해서는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 남북·한미 간 양자협의를 우선시하되 한반도 주변국과의 다자간 외교 틀도 병행하는 멀티트랙 방식이 유력시된다. 지난 2005년 북한의 핵무기 파기 선언을 이끌어냈던 ‘9·19공동성명’식 접근법이 데자뷔되는 대목이다. 9·19공동성명은 핵 포기를 전제로 한 안전 보장,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 복귀 등을 담고 있다.
복수의 청와대 및 외교 당국자들은 문 대통령이 추진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큰 밑그림은 2005년 남북이 합의한 ‘9·19공동성명’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전하고 있다. 한 고위 당국자는 “그동안 북핵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해법들이 도출됐는데 그중 현실적인 것이 9·19성명”이라며 “현 정부의 해법은 9·19원칙과 큰 틀에서 같다”고 전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려는 여러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자국의 안보였는데 9·19성명에는 핵 폐기 시 북한의 안보를 우리나라와 국제사회가 어떻게 보장해줄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당시 9·19공동성명을 도출해낸 배경에는 한반도 6자회담을 비롯해 북핵 문제 당사국들의 다자간, 양자 간 외교적 절충 노력이 있었다. 또 다른 당국자는 “지금의 한반도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주요 틀들은 이미 9·19성명 내용에 다 녹아 있었다”며 “6자회담이라는 큰 그릇 안에 북미 정상화 논의 그룹, 한미일·한중일·동북아 평화협력 논의 그룹(러시아 의장), 대북 경제지원 논의 그룹(한국 의장)과 같은 여러 개의 작은 다자(小多者·소다자) 채널이 있었다”고 전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6일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대표단과 만나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국들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만드는 것도 이 같은 소다자 채널들을 멀티트랙으로 열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
이처럼 9·19공동성명은 현 정부의 비핵화 추진에 있어 바이블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를 그대로 원용하기보다는 일부 변형, 응용할 가능성이 높다. 9·19공동성명을 도출해냈던 주역인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도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현재는 그때(2005년)하고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하지만 북한과 미국 내 상황만 보면 다른 부분도 있다”며 “그래서 9·19공동성명 때의 것은 참고할 순 있지만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우리가 많은 ‘창의적인 생각’을 갖고 좀 더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2005년과 달라진 주요 상황은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고도화됐고 미국 외교안보라인에 한층 강경파들이 포진해 있다는 점 등이다. /민병권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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