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철이나 플라스틱 같은 신소재 발견을 통해 삶의 질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래핀은 머리카락 굵기 십만분의 1 두께를 갖는 얇은 2차원 물질로 조금만 첨가해도 기존 소재가 더 가볍고 유연해지고 더 단단해져 ‘꿈의 신소재’라 불린다. 그런 그래핀 소재 상용화에 성공해 응용제품 개발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기술벤처 기업인이 있다. 울산에 있는 ‘스탠다드 그래핀’의 이정훈 대표(45)가 그 주인공이다. 마침 서울로 출장 온 그를 만나 드라마 같은 그의 ‘그래핀 인생’을 들어봤다. 조용준 포춘코리아 객원기자 heme121@naver.com
“그래핀은 제 인생 그 자체입니다. 저에겐 공기와도 같은 존재죠. 항상 그래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잠을 자도 그래핀 관련 꿈을 꿉니다.”
이정훈 대표의 지인들은 그가 그래핀에 미쳤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가 이토록 미쳐있는 그래핀은 과연 무엇일까? 그래핀은 탄소원자가 육각 구조로 연결된 원자 두께의 한 층을 뜻한다. 강철보다 200배 이상 강한 강도, 구리보다 100배 이상 높은 전기 전도율에 유연성, 투명성 같은 물리적 특성까지 갖추고 있어 기적의 신소재라 불린다. 그래서 역사상 철, 석유, 플라스틱 발견 이후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차세대 신물질로 평가 받고 있다.
2012년에 설립된 스탠다드그래핀은 세계적 수준의 그래핀 생산기술력을 갖춘 벤처기업이다. 기업 역사는 짧지만 전신인 연구소 시절부터 쌓아온 탄소나노테크 연구 경험까지 합치면 무려 22년 업력을 쌓아왔다. 이 회사는 천연 원료인 흑연에서 그래핀파우더를 제조해 고품질 그래핀을 안정적으로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그래핀 상용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핀 생산방식은 크게 ‘화학기상증착 방식’(Chemical Vapor Deposition, CVD)과 ‘화학적 박리방식’(Chemical Exfoliation)으로 나뉜다. ‘화학기상증착 방식’은 생산 비용이 엄청나 현재까지 상용화의 걸림돌이 되어있다. 스탠다드 그래핀은 화학적 박리방식으로 그래핀파우더를 생산하고 있다.
이정훈 대표는 말한다. “그래핀 소재를 대량생산할 수 있느냐가 상용화의 핵심입니다. 그와 함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하죠. 대량생산이 이뤄져 시장에서 좋은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인정받아야 상용화가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저희에겐 현재 단계에 도달하기까지 약 6년 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신소재 시장 진입장벽 삼고초려로 뚫어
이정훈 대표는 갑자기 두개의 플라스틱 샘플 병을 꺼냈다. 하나는 500㎖ 병에 가득 찬 검은 가루였고 다른 것은 100㎖ 병 밑바닥에 조금 깔린 검은 가루였다. 놀랍게도 부피가 500㎖인 검은 가루의 무게는 3g인 반면, 바닥에 조금 깔린 10㎖ 정도의 가루는 5g이었다.
“가벼운 것이 저희 제품인 그래핀 파우더입니다. 무거운 것은 현재 시장에서 그래핀 업체들이 GNP(Graphene Nano Platelet)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그래핀이 아닙니다.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론상 그래핀은 흑연 원자 하나 두께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얇죠. 이 두께를 1층이라고 표현합니다. 저희 제품은 3~4층의 적층 수를 자랑합니다. 결국 쪼개는 기술이 핵심인데, 저희에 필적할 만한 경쟁업체는 현재 없습니다. 그러나 GNP는 그래핀 유사품으로 적층수가 수십에서 수백 층에 달합니다. 동일한 물질로 볼 수 없는 거죠. 이것이 5-6년 동안 시장에서 그래핀이란 이름으로 유통되어 왔습니다. 수많은 업체들이 이 물질을 사서 테스트 해봤지만 기대했던 효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진짜 그래핀을 들고 세상에 나왔을 때, 상당수 파트너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새로운 신소재가 뛰어들기에는 시장의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 기존 소재시장의 공룡업체들은 새로운 소재의 등장을 결코 반기지 않는다. 굳건한 이해관계로 형성된 역학구조를 뒤집기는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유사 그래핀으로 왜곡된 시장을 바로 잡는 데 수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퇴짜를 놓은 업체들도 두 번, 세 번 찾아가 설득했다. 삼고초려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는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업계에서도 그의 진실을 이해하고, 스탠다드 그래핀 제품의 우수성을 점점 인정해주고 있다.
그래핀 활용한 응용제품 개발에 총력
현재 스탠다드 그래핀에서 역점을 두고 있는 건 그래핀파우더를 이용한 응용제품 개발이다. 지금까지 ‘그래핀 자전거’, ‘그래핀 복합물질’, ‘그래핀 정수필터’, ‘그래핀 3D 프린팅 필라멘트’ 등 수십여 개 응용제품들을 개발해왔다. 항공업계, 자동차업계, 스포츠 장비 업계 등 전 세계 100여 개의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지금도 각 분야 응용제품들을 연구·개발하고 있다.
“응용제품은 기존 소재에 그래핀파우더를 배합하는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고가인 탄소섬유 강화플라스틱 자전거의 무게가 6.7㎏인데, 거기에 우리 그래핀파우더를 섞으면 5.5㎏까지 무게를 줄일 수 있습니다. 자전거 1g 무게에 100만 원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저희는 1,200g을 줄였으니 그 부가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원래 비행기 소재에 그래핀을 넣으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항공기 제작업계 특성상 받아들이는 시간이 워낙 많이 걸려 자전거 경량화로 그래핀의 우수성을 증명했다고 한다.
이정훈 대표는 그래핀 응용제품의 잠재력이 가장 큰 시장으로 풍력발전 시장을 꼽고 있다. 풍력발전기 블레이드(날개)는 현재 유리섬유로 되어있다. 하지만 그걸 탄소섬유로 바꿔 무게를 줄이려는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다. 블레이드에 그래핀을 넣을 경우 더욱 탄탄하고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풍력발전기는 축의 공사비가 특히 큰데, 블레이드 무게를 줄이면 축 공사비를 줄이고 발전 효율성도 올릴 수 있다.
이 대표는 그래핀 소재의 또 하나의 응용분야로 화장품과 의료분야를 눈여겨보고 있다. “최근 저희가 한 파트너사와 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미백효과 등이 뛰어나 화장품에도 널리 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머릿결을 손상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색으로 염색할 수 있는 기술도 논의를 하고 있죠. 그래핀을 활용한 화장품 및 의료시장도 조만간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정훈 대표가 요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그래핀 소재 기능 중 하나는 정수필터로서의 뛰어난 효과다. 그가 정수 필터를 개발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었다. “홈쇼핑에서 된장을 파는 걸 보았습니다. 카메라가 장독 안을 보여주는데 메주와 함께 숯이 있더라고요. 숯은 흑연과 가까운 탄소 베이스로 살균효과가 뛰어납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서 힌트를 얻어 연구원들과 함께 그래핀 정수 테스트 해보니 효과가 뛰어났습니다. 간이 필터였음에도 잉크까지 깨끗한 물로 만들어주더군요. 바이러스와 세균 박테리아들도 완벽하게 제거했습니다. 지구상 최악의 오폐수인 염색폐수를 대상으로도 실험을 해보니 방류가 가능할 만큼 정화가 됐습니다. 현재 중국의 한 염색업체와 공동으로 산업용 정수필터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곧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겁니다.”
UN 보고서에 따르면, 오염된 물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은 아직도 하루 약 9,000명에 이른다. 이 대표는 그래핀 필터를 이용하면, 적은 비용으로도 지구촌 식수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스탠다드그래핀이 ‘사회적 기업’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의 그의 소신이다. “저희 주주 가운데, NFL에서 미식축구 선수로 뛰고 있는 피에르 가르송(Pierre Garcon)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가 아이티 출신인데, 그곳은 물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피에르 재단과 함께 저희 기술로 아이티의 물 문제를 해결하려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투자 귀재’ 짐 로저스도 투자
이 회사에 투자하고 있는 사람은 피에르 가르송 뿐만이 아니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스탠다드 그래핀에 투자를 했다. 특히 작년 1월에는 세계적 투자자 짐 로저스(Jim Rogers)로부터 투자를 받은 세계 유일의 그래핀 업체로 국내 언론에 보도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로저스 회장은 저희 주주 한 분이 소개를 해주셔서 만나게 됐습니다. 싱가폴에 있는 로저스 회장 자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분은 저와 코드가 아주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미팅을 시작한 지 15분 만에 좋을 결과를 낼 수 있었죠. 로저스 회장의 애견까지 제 발 밑에 앉아 저를 오랜 가족처럼 대해 주었습니다(웃음). 로저스 회장은 제가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좋은 친구이자 가족 같은 분입니다. 현재 저희회사 주주이자 고문직을 맡고 계시는데, 다양한 분야에서 그래핀의 상용화를 돕고 있습니다.”
그래핀 상용화에 성공하고 해외 유명인으로부터 투자 유치까지 이끌어냈지만 이정훈 대표 앞에 놓인 길은 여전히 가시밭길이다. 다양한 응용제품을 개발하고 있지만, 의미 있는 매출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대표에게 그 길은 익숙한 길이다. 꿈이 완전하게 실현될 때까지 그의 ‘그래핀 인생 드라마’는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래핀 산업의 생성은 단지 하나의 새로운 산업의 탄생이 아니라, 플라스틱이나 석유의 발견처럼 모든 산업계의 근본이 되는 기저 산업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그래핀 소재가 이런 기업들과 상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더 많이 조성해, 대한민국 기업들과 함께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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