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디자인진흥원이 신임 원장의 첫 번째 주요 시책으로 생활 여건이 어려운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무료 결혼식과 전시관 대관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디자인업계의 고질병인 장시간 저임금 노동과 불공정계약에 대한 본질적인 개혁방안 대신 전시행정에만 몰입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디자인진흥원은 과거 이태용 전 원장 시절 디자인표준계약서를 도입하며 불공정거래 근절에 나서기도 했지만, 일관되고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해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디자인진흥원은 업계의 적폐인 불공정거래와 갑질을 혁파하려는 노력 대신 잘못된 관행 탓에 생활이 어려운 디자이너들에게 그저 결혼식 지원을 하겠다는 안이한 ‘보여주기 행정’에 치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2일 디자인진흥원은 코리아디자인센터에 입주해 있는 웨딩업체와 함께 여건이 어려운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무료 결혼식과 전시관 대관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디자인진흥원은 경제적 이유 등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거나 미뤄왔던 디자이너 커플에 대한 무료·할인 웨딩 지원을 지속할 계획이다. 진흥원 측은 “공공기관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이라며 ““결혼식과 전시관 지원은 공공기관으로서 우리 이웃과 디자이너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이벤트”라고 설명했다.
특히 디자인진흥원은 무료 결혼식이 지난 4월 채용비리 논란에 휩싸였던 정용빈 전 원장의 사임으로 7개월 간의 공백 뒤에 취임한 윤주현(사진) 원장이 공들여 만든 첫 번째 시책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윤 원장은 취임 100여일 기자간담회를 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대외활동을 하지 않아 왔다.
윤 원장은 최초의 여성이자 최연소 디자인진흥원장으로 디자인업계의 고질적인 병폐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데 노력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아왔다. 하지만 업게는 이번 무료 결혼식 지원을 생색내기용 방안이자 전형적인 전시행정으로 보는 분위기다. 한 디자인회사의 대표 A씨는 “디자인진흥원이 불공정계약과 갑질에 시달리는 디자이너들을 위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3개월 전에 원장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정도로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디자인진흥원의 존재감이 없어진 지 오래인데도 시혜성 사업만 펼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디자인업계는 갑질에 시달리는 대표 업종이다. 디자인기업 피해지원센터의 ‘2016 디자인전문회사 피해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기업 중 17.6%가 디자인 프로젝트 수행 시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디자인진흥원에 신고된 국내 디자인전문회사를 5,000여개로 추산할 때 2016년 한 해에 겪은 피해 규모만 648억원에 달한다.
이에 디자인진흥원은 지난 2013년 ‘디자인표준계약서’ 등을 개발·보급하는 등 개선에 나섰지만, 정작 디자이너들은 이 계약서가 ‘표준’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장황하고 불필요한 내용이 많다며 사용을 꺼리고 있다. 디자이너 B씨는 “표준계약서가 보급된 것은 알지만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다”며 “진흥원이 디자이너들을 위한다면 일회성 전시행정보다는 현장에 적합한 표준계약서 도입과 불공정행위 적발·신고 시 제대로 된 보상 등이 이뤄지게 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디자인진흥원 관계자는 “신임 원장은 취임 이후 복수의 디자인 관련 협회와 간담회를 가지며 디자인업계의 고충 등을 파악했고 디자이너들이 겪고 있는 불공정거래 등을 해결하기 위해 현재 운영 중인 디자인 분쟁조정위원회를 디자인 119나 디자인 112 등으로 확대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며 “이번 사업은 디자인진흥원이 현 시점에서 소프트하게 진행할 수 있는 사업을 찾던 중 나온 아이디어”라고 해명했다. /김연하기자 yeon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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