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성 정책실장은 저한테 빨간주머니, 파란주머니를 주고 가셨습니다. 어려울 때 열어보라고 하셨습니다”
1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김수현 신임 청와대 정책실장의 첫 기자간담회. ‘장하성 전 정책실장이 떠날 때 당부한 말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실장은 이같이 답했다.
평소 기자들 앞에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던 김 실장의 ‘농담 반 진담 반’ 답변이 의외였기 때문일까. 엄중했던 기자간담회장에는 웃음이 퍼졌다. 동시에 과연 장 전 실장이 김 실장에 남기고 간 주머니에는 무엇이 담겼을 지에 대한 궁금증도 커졌다.
김 실장이 이날 언급한 ‘주머니’는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과 조자룡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제갈공명은 유비와 함께 오나라로 떠나는 조자룡에게 ‘어려울 때 꺼내보라’며 3개의 주머니를 들려 보냈다. 오나라에 도착한 조자룡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주머니를 꺼내 보며 난관을 헤치고 유비를 탈출시킬 수 있었다.
장 전 실장에 이어 청와대 정책실을 책임지게 된 김 실장 앞에도 수많은 난제가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올해 들어 고용과 투자 지표가 급격히 부진해졌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경기하강이 시작될 수 있다는 전망이 곳곳에서 나온다. 김광두 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이날 “경제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 미국의 금리 인상과 무역 분쟁에 따른 대외 불확실성은 커지고 ‘정책 실패론’이 불거지며 문 대통령 지지율 또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김 실장은 문 대통령 최측근이자 ‘왕수석’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경제부총리가 경제 사령탑’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관료사회와 시장은 이를 믿지 않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장하성 전 실장이 건넨 주머니 같은 것이 실제 하지는 않겠지만, 두 사람이 정책실장과 사회수석 관계로 1년 반에 걸쳐 일해 온 만큼 정책의 연속성을 지켜달라는 당부 같은 것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실제 김 실장은 이날 장 전 실장이 설계한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서 “큰 틀에서의 수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시장의 비판을 의식한 듯 정책 속도를 들여다보고, 균형을 맞추겠다는 언급은 있었다. 본인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를 의식해 자세를 한껏 낮추는 모습도 보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장 전 실장이 재임 중 본인 스스로 아쉽거나 놓쳤던 부분에 대해서도 김 실장에게 충분히 전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장 전 실장 재임 중 가장 논란이 된 경제부총리와의 갈등, 정부 부처의 조직적 저항 등에 대해 ‘학자’ 출신 청와대 정책실장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얘기가 오고 갔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기획재정부 등 정부부처 내부에서는 ‘홍남기 부총리-김수현 정책실장’ 조합이 예전처럼 큰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무게중심’은 결국 김 실장한테 쏠릴 것이란 전망이 여전하다. 경제부총리와 정책실장이 ‘원팀’을 강조하고 있으나, 청와대와 부처의 갈등 및 관료들의 저항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이날 장 전 실장이 주도한 1기 경제팀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제가 감히 평가 말씀을 드리기는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다만 “인수위 없이 출범한 정부의 큰 틀의 경제 방향을 잘 잡아주셨고 그 틀 속에서 성과를 거두고 하방압력이 높아진 상황에서 관리를 잘 해야 하는 숙제를 2기 팀이 맡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윤홍우기자 seoulbir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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