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외국계 투자은행(IB)관계자는 “기관 투자자의 관심은 오로지 적법한 방법으로 본업에서 돈을 많이 벌어달라는 것”이라면서 “지배구조 개편이 투자 수익으로 돌아올지 의문이었고, 현대차의 한전부지 인수에 대한 반발도 많았다”고 전했다.
외국 기관투자자 입장에서는 본업을 잘해서 주가를 띄워주는 게 최선이고 그도 안된다면 투자금을 돌려받기 위해 차선으로 배당이라도 달라는 얘기다. 현대차가 부동산 투자를 할 거면 투자금을 돌려받아 우리가 직접 하든가 전문가에 맡기겠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지난해 엘리엇의 공격이 현대차를 흔든 것도 이 같은 해외투자자의 공감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실 국민연금 등 국내 기관투자자 역시 드러내지 않았을 뿐 같은 입장이었다 .
8개월 후인 2019년 1월. 정 부회장은 이사회에서 한전부지에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를 건설하면서 외부 투자를 받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현대차는 부지 매입비 10조 5,500억원을 제외하고도 개발비에 3조 7,000억원이 필요한 데 이 중 절반 이상 금액을 외부 투자자의 돈으로 메우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외국계 투자은행(IB)을 자문사로 세웠으며, 싱가포르투자청(GIC)등 복수의 해외 기관투자자가 긍정적인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정몽구 회장에도 이 같은 계획을 보고했다고 말했다.
기세등등했던 엘리엇은 올해 대규모 배당확대를 주주제안으로 내놨지만, 해외 기관투자자와 의결권 자문사의 외면 속에 22일 주주총회에서 패했다. 무엇이 1년 만에 우군을 돌아서게 한 것일까. 실마리는 현대차의 아킬레스건이던 한전부지 개발사업이다.
현대차는 3조 7,000억원의 상당액을 다른 곳에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차와 계열사가 GBC로 모두 입주하면 약 3,300억 원에 샀던 기존 양재동 본사를 팔아 차익을 남길 수 있다. IB 업계에서는 GBC 개발 구조를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최소 3조원 이상 추가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투자업계에서는 오피스 투자시 40%는 대출, 60%는 지분 투자 형식으로 짜며 현대차 그룹은 60%에 해당하는 지분의 절반 가량 부담하면 주도권을 쥘 수 있다. 현대차가 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임차인이 되는 매각후임대(세일즈앤리스백)방식도 가능하다.
GBC 개발은 오랫동안 묶여 있었지만, 땅값은 계속 올랐다. 2015년 인수당시 공시지가는 1㎡당 2,560만원이었지만 2019년에는 5,670만원으로 뛰었다. 최근에는 외국계 IB의 한국 담당 애널리스트 사이에서도 한국의 부동산 시장 구조를 간파하고 현대차의 GBC 개발이 투자 수익 면에서 나쁘지 않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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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가 외부 투자를 받아 GBC 개발에 나선 것은 자본을 효율적으로 굴려 본업에 집중하라는 주주들의 목소리 때문이다. 현대차의 현금성 자산은 2018년 기준 52조 원에 달하지만 기관투자자들은 차입투자를 통해 수익률 극대화를 꾀하길 원했다.
동시에 현대차는 5년간 미래기술에 14조 7,000억원을 투자한다는 중장기 비전을 발표했다. 이 중 절반 가량인 6조 4,000억원은 차랑공유에 투입한다. 국내에서는 택시업계 반발로 차랑공유 서비스가 더딘 탓에 북미의 미고, 동남아의 그랩, 호주의 카넥스트도어 인도의 레브 등 해외 모빌리티 업체에 투자했다. 현대차는 이를 기반으로 사업모델을 구축한 뒤 2021년부터 로보택시를 상업화할 계획이다.
나머지 중 3조 3,000억원은 전기차·수소차 등 전동화, 2조 5,000억원은 자율주행과 커넥티드에 배분했다. 실제 현대차가 21일 출시한 신형쏘나타에는 스마트폰에 연동해 차량의 많은 설정을 개인에 맞추는 커넥티드 시스템을 적용했다. 이는 앞으로 차량공유 사업에도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현대차에 투자한 외국계 기관투자자는 엘리엣 같은 비교적 단기차익을 노린 행동주의 펀드만 있는 게 아니다. 뱅가드 같은 민간 펀드 뿐 아니라 각종 연기금 등은 오랫동안 투자하며 시장흐름을 따르는 패시브 펀드다. 이들은 지난해까지는 엘리엇과 손을 잡았지만, 현대차가 GBC 투자를 효율적으로 바꾸고 본업 투자에 집중하겠다고 밝히면서 현대차를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한 셈이다. 반면 엘리엇은 과도하게 많은 배당을 요구하며 ‘더 길게 큰 수익을 낼 수 있는데 판을 깨자는 것이냐’는 반발을 샀다.
문제는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이다. 정부 정책에 따라 정 부회장 승계를 위해서는 개편이 필요하지만, 엘리엇을 제외한 기관투자자와 현대차가 윈윈할 수 있는 묘책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단순히 정부 정책에 따라 개편하는 것은 주주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 판매를 위해 금융사가 필요한 현대차로서는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거느릴 수 있게 한 금융지주회사법이 통과될 기미가 없어서 선택의 폭도 좁다. 업계 관계자는 “일각에서 이번 주총 직후에 개편안을 내놓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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