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도(冊架圖)’는 선비의 책장이나 서책, 각종 문방구 등을 그린 조선 시대 민화의 한 장르다. 정조(1752~1800)가 사랑했으며 김홍도가 당대 최고였다고 전해진다. 지극히 한국적 미술이지만 중국은 물론 유럽과도 ‘인연’이 있다. 인본주의를 내세우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귀족들은 귀한 수집품 전시장을 겸한 개인 서재인 스투디올로(Studiolo)를 자랑스러워했고 마침 당시 투시도법을 활용한 원근법이 확산됐기에 그림으로도 남겼다. 그 시절 밀라노 화가였던 카스틸리오네(郞世寧·1688~1766)는 예수회 선교사 자격으로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귀족들의 자랑거리인 장식장을 주제로 한 ‘다보격경(多寶格景)’을 완성했다. ‘책가도’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그림이다.
14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토르토나 지역의 슈퍼스튜디오에서 폐막한 한국의 공예전시 ‘수묵의 독백’이 극찬과 공감을 얻은 이유 중 하나는 책가도에서 착안한 전시기법이었다. 디자인 스튜디오가 밀집한 이곳으로 전 세계의 눈이 쏠리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맞춰 한국공예의 저력을 보여주고자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지난 2013년부터 매년 개최해 온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전인데, 올해는 패션디자이너 정구호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정 예술감독은 투명 아크릴을 재료로 전시장을 꽉 채울 크기의 책가(冊架)를 제작해 그 안에 출품작들을 설치했다. 책가도를 연상시키는 데다 투명한 선반은 흑백의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정 예술감독은 “단지 먹 하나로 색의 한계를 넘나들었던 수묵화와 같이 흑백이 이루는 색의 대림을 초월해 한국 전통에 대한 경외심을 전하고자 흑과 백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줄 수 있게 디스플레이 했다”면서 “20명 작가의 작품들이 칸칸이 놓여 거대한 설치작품처럼 보이는 책가도는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는 공예의 실상이 전통 장인들의 각고의 노력과 헌신으로 이뤄진 하나의 결과물임을 반증한다”고 소개했다.
유기장인 이기홍과 이혁 부자(父子) 유기장은 유기에 은도금을 했고 양현승 장인은 장석으로 투명 사방탁자를 만들어 전통미감을 신비롭게 끌어올렸다. 이상협의 은방짜, 김상인의 도자, 홍연화의 지승(종이공예)이 풍기는 백색미감은 최석현의 나전함, 서신정의 채상(죽공예), 양병용의 소반이 자랑하는 흑색미감과 조화를 이뤘다. ‘안상수체’로 유명한 안상수는 ㅎ을 이용한 문자도를 내놓았고 성파스님의 옻칠공예도 선보였다.
전시를 본 지젤라 보리올리 슈퍼스튜디오 디렉터는 “한국의 공예가 옛것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 산업 혁신을 이끄는 원동력임을 확인했다”고 말했고 로셀라쵸 밀라노국립대 동양사 교수는 “출중한 재료들이 장인의 손길을 만나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함으로 공예와 예술,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찬사를 보냈다. 미국 LA카운티미술관(LACMA)의 아시아관 디렉터가 이 전시를 미국에서도 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후문이다. 전시는 지난 7일 VIP개막을 시작으로 14일까지 열려 23명 작가 75점의 작품을 보여줬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