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전주의 자립형 사립고인 상산고에 보낸 고교 동창은 기숙형 고교 예찬론자다. 집에서 이런저런 문제로 아이와 다툴 일이 없다. 친구 딸은 주말에도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학교에 남아 스스로 공부한다고 했다. 방학 때가 아니면 사교육비를 댈 일도 없다. 고3 수험생을 둔 기자로서는 “가정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그가 내심 부러웠다. ‘고3 스트레스’에 죄인 아닌 죄인 심정으로 살아가는 학부모들이 어디 한둘인가. 집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는 수험생 가족의 현실은 그에게는 남의 얘기다.
친구가 엄지 척한 상산고를 몇 주 전에 다녀왔다. 자사고의 재평가 공정성 논란에 전국의 자사고들이 홍역을 앓을 때였다. 유독 상산고가 주목받은 것은 몇 안 되는 지방 명문고여서만은 아니다. ‘상산고를 지켜달라’는 학생과 학부모의 호소부터 눈길을 붙잡았다. 전북의 자사고 재지정 커트라인이 유일하게 10점 높은 것도 의아했다. 재평가를 둘러싼 갈등은 이번만이 아니다. 5년 전에도 그랬다. 서울시교육청은 6개 자사고를 지정 취소했지만 교육부가 없던 일로 해버렸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볼썽사나운 소송까지 갔다.
예나 지금이나 자사고를 죽이자 말자는 갑론을박만 있을 뿐이다. 2009년 자사고 확대 이후 고교 입시와 고교 체제를 어떻게 개선할지 근본적 해법 모색은커녕 평가제도의 합리성과 공정성을 기할 논의조차 없었다. 그저 선거판에 공약만 난무했을 뿐이다. 공교육 정상화라는 본질은 내버려둔 채 전체 고교의 3%도 안 되는 자사고 존폐라는 곁가지를 놓고 허송한 교육정책의 난맥을 여실히 보여준다. 올해로 끝도 아니다. 내년에 나머지 12개 자사고 외에도 외고·국제고 36곳이 평가를 받을 때 또 어떤 몸살을 앓을지 모른다.
옥석을 가리지 말자는 말은 아니다. 자사고는 나름의 경쟁력이 없으면 저절로 고사하게 돼 있다. 등록금은 3배나 비싼데 일반고와 다름없는 역량을 보여준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우선선발권 덕에 우수학생을 싹쓸이라도 했지만 이제는 내신을 가미한 추첨제로 바뀌었다. 지금은 우선선발권도 폐지됐다. 자사고라는 타이틀만으로 명문고라 내세울 세상이 아니다. 평판이 나빠지면 신입생을 다 채울 수도 없다. 자사고 9곳과 외고 1곳이 스스로 일반고로 전환한 연유다.
일반고 강제 전환은 자율 전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학교 측이 승복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이번 평가에서 탈락하는 자사고는 행정소송을 예고하고 있다.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됐다는 이유에서다. 과거보다 커트라인을 10~20점 올리고 정성평가 배점을 높인 평가 요강은 지난해 말에서야 전달됐다. 출제 범위를 시험 보기 직전에 알려주고 난이도까지 올렸으니 말썽나지 않을 턱이 없다.
교육부가 교육청에 자사고 문제를 떠넘긴 것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대선 공약대로 폐지한다면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한 줄만 고치면 그만인데도 교육청의 뒤로 숨었다. 평가 과정도 손 놓기는 마찬가지다. 강제 퇴출의 휘발성을 고려하면 평가 기준 변경에 앞서 학교 측이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옳았다. 평가 후 퇴출 판정을 받으면 내년부터 곧바로 일반고로 전환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평가 목적은 자사고가 설립 취지에 맞게 학교를 운영하느냐 여부다. 평가가 폐지로 가는 외식절차가 아니라면 문제 개선의 기회를 주는 것이 온당하다. 그래야만 일반고 전환이 연착륙할 수 있다.
교실은 교육감이 새로이 선출될 때마다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왔다. 사학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인식 차이와 수월성 교육에 대한 호불호 등에 따라 교육정책이 바뀐다면 어떤 평가든 결과에 대해 수긍하기 어렵다. 자사고의 운명을 길거리 정치로 선출된 교육감의 손에 맡길 수 있느냐는 근본적 회의감마저 든다. 백번 양보해 자사고가 없어지면 공교육이 정상화하고 일반고의 역량이 높아지며 사교육이 줄어드나.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 학부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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