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의 연이은 상법 드라이브 배경에는 증시 부양이라는 당정의 공감대가 자리 잡고 있다. 여당이 되자마자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1호 여야 합의 법안’으로 통과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민주당은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코스피 5000 시대를 열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상법 개정안 처리 일주일 만에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을 내놓은 것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이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도 대선 예비후보 신분이던 4월 “상장회사의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소각해 주주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도록 제도화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민주당은 법안의 적용 방식이나 범위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이지만 자사주 매입을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해온 재계는 당장 비상이 걸린 모습이다.
9일 발의된 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기업이 사들인 자사주를 취득 후 1년 이내에 소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대표 발의자인 김남근 민주당 의원은 “미국의 모범회사법이나 이를 따르는 캘리포니아 회사법은 자사주를 ‘발행되지 않은 주식’으로 간주해 사실상 소각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며 “독일도 자사주 보유 비율이 10%를 초과하는 경우 3년 이내 소각을 의무화하고 있다”고 짚었다. ‘원칙적’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사실상 ‘의무 소각’인 셈이다. 다만 임직원 보상(스톡옵션) 등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주주총회 승인을 통해 예외적으로 자사주 보유가 허용된다.
재계에서는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될 경우 외부 투기 세력으로부터 경영권 방어가 어렵다고 우려한다. 국내법상으로는 자사주 외에 마땅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자사주는 자체로 의결권이 없지만 경영권 공격을 받을 때 우호 세력에 넘기면 의결권이 살아나 방어에 활용할 수 있다.
한국과 달리 주요 선진국들은 자사주 외에 차등 의결권, 포이즌필 등 다양한 경영권 방어 장치를 두고 있다. 미국·일본·영국·프랑스 등은 차등 의결권을 인정한다. 차등 의결권은 창업자나 대주주가 가진 주식에 일반 보통주보다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쿠팡 창업자 김범석 의장이다. 김 의장은 미국 증시에 상장하면서 클래스B 주식을 통해 주당 29개의 의결권을 부여받았다. 이로써 김 의장은 10% 미만의 지분으로 전체 의결권의 70% 이상을 행사할 수 있다. 단 한 주만으로 주요 의사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황금주도 차등 의결권의 일종이다.
정권 교체 한 달 만에 상법에 여러 변화가 생기는 것도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이달 3일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에 담긴 ‘주주 충실 의무’ 조항은 국무회의에서 공포되는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감사위원 선임 시 대주주 의결권 제한하는 이른바 ‘3%룰’은 공포 1년 뒤부터 시행된다.
11일에는 이번 상법 합의 과정에서 제외된 △집중투표제 강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 후속 입법에 대한 공청회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다. 이 가운데 ‘집중투표제’는 각 주주가 보유한 의결권을 특정 후보자에게 몰아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미 통과된 ‘3%룰’과 맞물리면 더 강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민주당은 합의 처리를 원칙으로 하되 올해 정기국회 내에는 상법 개정을 ‘완성’하겠다는 목표다.
자사주 소각 법안에 대한 논의도 정기국회 기간 중 동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세부 내용을 두고 당내 다양한 의견이 있는 만큼 조율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당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오기형 의원은 전날(8일) “상법으로 할 건지, 자본시장법으로 할 건지 논쟁이 있을 수 있어 다양한 형태의 제안이 7월 중 나타나면 취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재계 요구 사항인 배임죄 완화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를 이어갈 방침이다. 오 의원은 “경영계 우려 관련 논의도 열어놓고 할 것”이라며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이 (배임죄 완화) 법안을 발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후 또 다른 제안이 있다면 점검하겠다”고 덧붙였다.
민주당의 상법 광폭 행보에 재계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는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경영권 방어 장치가 없어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쓰는 실정”이라며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추진하려면 다른 경영권 방어책을 함께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게 미국·일본·프랑스 등에서 활용되는 ‘포이즌필’이다. 경영권 위협이 발생할 경우 기존 주주에게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주식을 매수할 권리를 부여해 적대적 세력의 지분율을 희석할 수 있는 제도다. 지난해 7월 미국 항공사 사우스웨스트에어라인 이사회는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이 지분 11%를 사들인 후 최고경영자(CEO) 해임, 이사진 교체 등 경영권을 공격하자 포이즌필을 발동해 기존 주주에게 시가 대비 50% 할인된 가격에 주식 매수 권리를 부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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