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5시께 서울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으로 향했다. 이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들과 만나기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기업에서는 만남 장소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가구박물관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동했다. 아니나다를까 모임 예정 시간인 오후7시가 가까워지자 가구박물관에는 취재진과 기업 홍보실 관계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현장에서 만난 기업 관계자들은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뗐다. 손 회장의 이번 방한 메인 행사가 기업인들이 아닌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기업인들은 자신들이 주연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실제 이날 대기업 총수들도 기자들과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급하게 떠났다.
요즘 대기업 총수들이 참 바쁘다. 지난달에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녀갔고 이달에는 손 회장이 한국을 찾았다. 또 한일관계 경색으로 일본 정부가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핵심소재 수출을 무기로 압박하자 청와대에서도 총수들과 잇달아 회동을 가진다. 대기업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때아닌 대목(?)을 맞고 있다. 취재할 현장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장에서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불가능에 가깝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총수들을 칭찬하면서도 한 마디 발언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청와대와 기업인들이 만나더라도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손 회장과 대기업 총수들의 만남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하나 있다. 애초 이날 만남은 오후8시30분께 끝날 것으로 예상됐다. 실제 예상했던 시간이 가까워지자 주차장에는 대기업 총수들의 차량이 대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날 만남은 예상을 훌쩍 넘긴 오후9시30분에야 끝이 났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았을까. 기업인들의 솔직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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