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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 초록비가 내리는 집…'고산의 정취'에 젖다

■전남 해남

효종이 스승 윤선도에 하사한 집

해체해 해남에 다시 지은 녹우당

조선 최고 문장가 자취 살아있어

재산 상속조건 기록한 '분재기'

고려시대 노비상속문서 등

해남 윤씨 집안 다양한 유물도

효종이 스승인 고산 윤선도에게 하사한 녹우당. /사진제공=해남군청




효종이 스승인 고산 윤선도에게 하사한 녹우당. /사진제공=해남군청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 동산에 달(月)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의 일부다. 윤선도가 정철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원인을 따져보면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낸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윤선도는 25세에 급제했지만 당파 싸움의 와중에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게 밀려 벼슬길과 유배길을 번갈아 걸었다. 하지만 유배와 은둔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발휘하는 촉매제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오우가’ ‘어부사시사’ 같은 걸작은 대부분 자연 풍광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 밥을 먹고사는 자로서 조선 최고 문장가의 자취를 살펴보기 위해 전남의 해남 땅을 밟았다.

해남 윤씨의 종가 녹우당(綠雨堂)은 글자 그대로 ‘초록색 비가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다. 당호가 이 정도니 글줄이라도 쓸 줄 아는 자라면 기가 안 죽을 수 없다. 녹우당이라는 이름의 서정성은 기자가 아는 지명 중 청와대 뒤의 ‘보랏빛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자하문(紫霞門)과 더불어 가장 찬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름마저 아름다운 녹우당으로 가기 전에 먼저 거쳐야 할 곳이 있는데 다름 아닌 윤선도유물전시관이다. 지난 2010년에 1,830㎡ 규모로 조성된 이 건물은 이듬해인 2011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사회공공 부문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아름다운 건물로 윤선도의 명문(名文)을 보듬기에 부족함이 없다.

전시관은 4,600점의 자료를 전시하거나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는데 상당수가 보물로 지정된 진품들이다. 이 중에는 120장의 교지를 비롯해 다양한 문서와 시문(時文)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해남 윤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고려시대 노비상속문서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종가들은 저마다 다양한 유물을 자랑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집은 해남 윤씨 가문이 유일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깃든 유물들을 살펴보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면 북서쪽으로 300m 거리에 녹우당이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녹우당은 상시개방됐었지만 기자가 방문한 날은 사전에 약속을 하고 갔음에도 문이 닫혀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린 지 한참 만에 문이 열려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집의 형태는 호남에서 흔한 ‘ㄱ’ ‘ㄷ’자 집이 아닌 기호지방 양반집을 따른 ‘ㅁ’자 모양의 집이었다. 그 이유는 효종이 스승이었던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집을 해체해 배에 실어온 후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이연숙 해설사는 “이처럼 이전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 한옥은 시멘트 같은 접합제나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깎아 끼워 맞추는 공법으로 지었기 때문”이라며 “녹우당이 해남에 옮겨왔을 당시에는 99칸이었는데 화재로 일부가 소실돼 지금은 55칸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인 윤형식씨가 녹우당에서 책을 읽고 있다.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가 자손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조건을 기록한 문서인 ‘분재기’.


녹우당이라는 당호의 유래는 구구한데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나부껴 떨어지는 게 비가 오는 것 같아서’라는 설과 ‘비자나무에 바람이 나부끼는 소리가 빗소리 같아서’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녹우당의 다양한 스토리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가 자손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조건을 기록한 문서 ‘분재기(分財記)’와 관련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윤두서는 자녀들에게 전답을 내리는 조건으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재원을 만드는 논은 장자에게 상속할 것 △장자가 이 땅을 팔려고 하면 형제들이 만류할 것 △형제들의 만류에도 장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관에 고발할 것 등을 내걸었다. 바로 이것이 해남 윤씨 종손 윤형식씨가 500년 전에 물려받은 전답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게 된 이유다.

윤씨는 이와 관련해 “요즘은 상속법이 개정돼 유산을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게 됐다”며 “이렇게 되면 녹우당과 유물들도 불가피하게 분배될 수밖에 없어 지난해에 녹우당을 비영리재단으로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입장료 등 재단에서 나오는 수익을 이용해 선조들의 학문을 연구·발표하고 책으로 편찬하는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과연 고려시대 노비문서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집안의 종손다운 계획이자 포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해남)=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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