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우 선생은 두 얼굴의 사나이다. 낮에는 서울 여의도에서 치과의사로 일하고 밤에는 연극 연출가로 변신한다. 그의 이름이 낯선 이라도 안성기·박중훈이 주연한 영화 ‘칠수와 만수’의 원작자라면 ‘아하’ 할 수 있겠다. 1986년 연극으로 먼저 선보인 ‘칠수와 만수’는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무대로 우리 시대를 비춘다. 약자·소수자·비주류·변두리 인생, 억압받는 이들을 대표하는 이름 칠수와 만수는 시대의 경계를 넘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오 선생은 서울대 치과대학 연극반장이었다. 그 인연으로 ‘조각가와 탐정’을 발표하며 희곡작가로 데뷔했고 1978년 극단 연우(演友)무대의 대표를 맡아 사회풍자극의 명가를 탄생시켰다. 치과와 극장을 오가는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여일하다. 일상에 젖어 느슨해 있던 개인이 집단으로 한자리에 모일 때 돌연 광채를 내는 연극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텅 빈 무대에 사람 하나, 사람 둘이 더해지며 말과 마음을 나누는 몸짓의 마술적 공간을 그는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예술 감독을 맡은 ‘덴탈씨어터(dental theater)’는 연극을 사랑하는 치과인의 모임이다. 1999년 창단해 해마다 1~2회 공연을 꾸준히 해왔다. 세계 유일의 치과인 극단으로 올해 20주년 기념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10월31일 막을 올리는 헨리크 입센 원작 ‘입센의 공공의 적’이다. 정치권력·언론권력의 공격과 핍박을 뚫고 진실을 지키려는 한 인간의 외로운 싸움을 다룬 이 작품은 오늘 우리에게도 다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누가 민중의 적인가.
오 선생과 ‘덴탈씨어터’의 단원들은 공연 일정이 잡히면 진료를 끝내고 연습실로 달려온다. 주말도 연습이다. 피로가 쌓이고 가족이 불평해도 무대를 포기할 수는 없다. 대학로 전문극단도 10년을 넘기기 힘든 현실에서 무엇이 이들을 20년 넘게 묶어놓은 것일까. 이들에게 연극은 ‘기억하기’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치과 진료로 무뎌질 수 있는 생의 감각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연극이다. 연극은 고된 노동이면서 반복 가능한 놀이다. 인생은 두 번 살 수 없지만 연극에서는 여러 번 살 수 있다. 영국 출신의 원로 연출가 피터 브룩은 그의 대표 저서 ‘빈 공간’에서 연극의 본질을 ‘언제고 깨끗하게 닦아 새로 쓸 수 있는 석판’에 비유했다.
“일상에서 ‘만약’은 하나의 허구지만, 연극에서 ‘만약’은 실험이다. 일상에서 ‘만약’은 회피지만, 연극에서는 ‘만약’이 진실이다. 이 진실이 나의 이야기라고 설득될 때 연극과 삶은 하나가 된다.”
‘기억하기’는 한 사람의 일생뿐 아니라 한 사회, 한 국가의 구성원들을 단단하게 결집하는 근본 축이다. 연극 행위로 각자의 기억하기를 단련하는 ‘덴탈씨어터’ 단원들처럼, 나름 무엇으로든 기억하기를 체질화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의 면역력은 강화될 것이다. 문화재청은 최근 문화유산의 개방 확대와 활용에 적극 나서고 있다. 수천년 한민족의 문화유산이야말로 기억의 대 저장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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