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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경제] 트럼프 압박 탓? 농민 반발 속 WTO 개도국지위 포기하려는 이유는





한국은 아직 개발도상국입니다. 지난해 기준 국내총생산(GDP) 1조6,914억달러(약 2,022조원)로 205개국 가운데 12위를 기록했는데 무슨 개도국이냐고요? 통상당국에 따르면 다자무역체제인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서 한 나라가 개도국인지 아닌지는 누가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1995년 WTO 가입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분야에서는 개도국’이라고 선포하고 지금까지 수입품에 대한 고관세 적용, 국내 생산품에 대한 보조금 지원 등 ‘개도국 특혜’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정부는 24년 만에 개도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실 포기 결정만 남았다고 봐도 무리가 아닙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경제적 성장을 이뤄 우대조치가 필요치 않은 나라들이 개도국 우대를 받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내용의 ‘대통령 메모’를 전달했습니다. WTO 회원국 가운데 3분의 2가 ‘자기 선언’ 방식으로 개도국 특혜를 취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신인은 USTR이지만, 사실상 전 세계를 향한 엄포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면서 앞으로 이 가운데 하나라도 해당하면 개도국이 아니라며 네 가지 기준까지 제시했습니다. ▲OECD 회원 혹은 가입 절차 중인 국가 ▲G20 회원국 ▲세계은행 분류 고소득 국가(2017년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 1만2,056달러 이상) ▲세계 무역량에서 0.5%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가 그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 기준에 모두 해당합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주요 20개국(G20) 회원이면서 OECD 회원국인 멕시코, 한국, 터키도 개도국 지위를 주장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강대국이 한 마디 했다고 무조건 이를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황이 녹록지 않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수출 우대국가 명단(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제외하고, 그 연장선에서 우리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를 종료하기로 결정하는 등 최근 한국과 일본은 매우 불편한 관계가 됐습니다. 그런데 미국 역시 이 상황이 불편합니다. 한국의 이탈로 자국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팽창을 억제하려는 한·미·일 안보 삼각동맹 구상이 자칫 어그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개도국 엄포’는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것인데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고집하면 자칫 미국과 한국이 대적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정부의 또 다른 관계자도 “미국이 겉으로는 개도국 지위 유지와 무관한 척하면서도 사실상 이를 문제 삼아 무역공세에 나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소미아 종료로 가뜩이나 한미 동맹에 균열이 발생했다는 분석이 많은데 정부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정부가 개도국 지위 포기로 가닥을 잡은 가장 큰 이유이자 명분입니다.



통상당국은 우리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WTO 협정상 지금까지 시행해온 관세 부과, 보조금 지급 등은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앞으로 한국이 WTO 개도국 지위를 주장할 무역협상이 없다고 봐야 하고, WTO 회원국의 일원으로 확보한 권리는 개도국 지위와 상관없이 계속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은 중국이 차기 협정에서도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겨 새로운 협정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농업 분야가 입을지 모르는 피해에 대한 방지 대책 마련입니다. 농업계 관계자는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농업계의 기본 입장이지만 글로벌 무역환경 변화에 따라 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개도국 지위 포기로 인해 있을 수 있는 농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특별법 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당부 역시 빼놓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USTR에 보낸 대통령 메모에 ‘90일 내 관련 조치를 이행하라’며 마감 시한을 못 박기도 했습니다. 날짜로 따지면 다음 달 23일입니다. 대통령 메모가 전달되기 전에 대만(지난해 9월)과 브라질(올해 3월)이, 이후 UAE(지난 7월)과 싱가포르(지난달)가 각각 차례로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 개도국 지위를 스스로 내려놨습니다. 통상당국 관계자는 “마감 시한이 다가올 수록 더 많은 국가들이 ‘포기 대열’에 합류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방향은 정해졌다. 남은 것은 적절한 시기 찾기.’ 개도국 지위 포기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이렇게 한 줄 요약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종=조양준기자 mryesandn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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