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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지금 소를 잃어버린 것 아닌가

문성진 정치부장

공정 사회·일자리·강한 안보 등

文 대통령 약속 제대로 안 지켜져

광장에서 솟구치는 열기 모으고

마음 더 열고 국민에게 다가가야

문성진 정치부장




독일의 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누이가 지난주 서울에서의 식사자리에서 들려준 얘기에 가슴이 갑갑했다. 얘기인즉슨, 그 대학 한국학과는 일본학과에 속해 있어 인사와 예산, 학과 편성까지 모두 한국학과 스스로 하지 못하고 일본학과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구조다. 그래서 근래 수년째 한국학과를 지원하는 독일 학생이 급증하고 일본학과 지원자는 감소하는데도 올해 한국학과 정원을 절반으로 줄이는 황당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런 불합리한 처사에도 그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누이는 말했다. “난 아직도 일제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어떤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이 일방적으로 무역보복을 가해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도 없이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려도 바로잡을 방법이 변변찮은 게 현실이다.

상념 끝에 찾은 성북동 산자락의 심우장(尋牛莊)은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말년 거처였던 이곳을 나는 삶에 자문이 들 때 이따금 들르곤 한다. ‘심우장’ 현판이 걸린 두 평짜리 방을 마주하니 두 장면이 오버랩된다. 하나는 3·1 만세운동을 함께 했다가 변절한 최남선이 만나길 청했을 때 “내가 아는 육당은 죽었으니 돌아가라”며 꾸짖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전향을 회유하려던 일제 형사에게 “왜놈한테 돈 받을 일 없으니 나가라”고 호통치는 선생의 모습이다.

만해에게 굽힘이란 없었다. 심우장을 한옥으로는 드물게 북향으로 지은 것도 집이 남쪽을 향하면 조선총독부가 눈에 들어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그였지만 불교개혁을 위해 일제 통감부에 ‘건백서’를 보냈다고 한다. 건백은 정부나 임금에게 자신의 뜻을 올린다는 뜻인데 공동체에 절실한 개혁이라면 만해는 정치의 힘을 빌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만해는 스스로 취할 길을 찾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신의 거처를 ‘소를 찾는다’는 뜻의 심우(尋牛)로 칭한 것부터가 그렇다. 혹여 ‘소를 잃을까’ 염려했는지 실우(失牛)도 필명으로 사용했다.



‘조국 사퇴’가 언제인데 ‘조국 사태’는 아직도 끝날 기미가 없다. 경기 활성화, 일자리 창출, 집값 안정, 남북관계, 빈부격차 해소, 고령화, 저출산 등 난제가 하나둘이 아닌데 여도 야도 안중에 없다. 도대체 ‘소는 누가 키우나’ 의문이 절로 든다. 당연히 가장 큰 책임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있다. ‘촛불 정부’를 자처하며 공정한 대한민국, 일자리가 마련되고 성장동력이 넘치는 대한민국, 강하고 평화로우며 안전한 대한민국을 국민 앞에 약속했던 문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조국 사태’로 공정은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다. 일자리 기반은 제조업과 핵심 연령층을 중심으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2017년 3.2%였던 경제성장률이 지난해 2.7%로 내려앉더니 올해는 2%대를 지키기도 버거울 만큼 성장동력은 허약해졌다. 안보도 강한 평화롭고 안전한 나라라 말하기 옹색하다. 북한의 거듭된 도발과 러시아의 영공침범, 일본의 수출보복으로 빚어진 한일갈등, 한미동맹 균열 등 주변국과 불화는 갈수록 커져만 간다. 상황이 이렇다면 문 대통령은 ‘소를 잃은 것은 아닌가’ 자문할 필요가 있다.

돌아보면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탄핵을 찬성했던 80%대 국민의 여망이 뒷받침됐다. 탄핵에 찬성표를 던진 국회의원 234명도 연대의 파트너일 수 있었다. 이 모두를 우군 삼았다면 경제를 혁신하고 개혁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절호의 기회를 속절없이 흘려보내고 말았다. 국제관계에서도 미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고 일본과 공조의 틀을 만들었다면 북한 문제 등을 해결하기가 한결 용이했을 텐데 아쉽다.

만해는 ‘알 수 없어요’라는 시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고 노래했다. 이제 문 대통령은 이 광장, 저 광장에서 갈등하며 솟구치는 열기를 하나로 모아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다음달 9일이면 임기 반환점이다. 대통령이 마음을 더 열고 더 겸손하게 국민에게 다가가면 공정하고 성장동력이 넘치는, 강하고 평화롭고 안전한 나라를 함께 만드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우리가 걸어볼 수 있다. /문성진 정치부장 hns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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