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야담집 ‘어우야담’을 쓴 유몽인은 광해군 시절 권력을 휘둘렀던 북인(北人) 출신이다. 권력의 핵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예문관·홍문관·한성부좌윤·대사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인목대비 폐비 사건 때 ‘불가(不可)’를 외쳐 파직을 당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는 광해군을 끝까지 두둔하면서 결국 남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유몽인은 북인일까 남인일까.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0년대 ‘운동권’이었던 한 대학생이 우연히 경찰서 형사와 중국 여행을 같이 갔다. 둘은 함께 사진도 찍고 밥도 먹으며 자연스레 친해졌다. 한국에 돌아온 대학생은 경찰에 체포될 때 형사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에 징역을 면하고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에 나오는 자신의 얘기다. 그를 감싸준 형사는 좌파일까 우파일까.
지금이라면 유몽인과 형사와 같은 이는 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사사건건 피아로 구분해야 직성이 풀리는 시대다. 주말이면 광화문 아니면 서초동, 둘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분위기다. 어느 한쪽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소신에 따라 움직인 유몽인과 형사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주변인’이라고 불린다. 어떤 이는 회색이라는 표현도 아깝다는 듯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양자택일이 판치면 주변인은 넘쳐난다. 얼마 전 이주민 출신인 이자스민 전 의원이 자유한국당에서 정의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다. 거대 정당 어디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대 국회 때 그를 비례대표로 뽑았던 자유한국당은 20대 때 공천도 하지 않았다. 다양성을 포용하겠다고 외치던 더불어민주당도 그의 입당원서를 돌려보냈다. 일각에서는 그가 당을 바꿨다며 사시를 뜨고 바라보는 모양이지만 말은 똑바로 하자. 그는 단지 이주민을 위해 일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당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당이 그를 버렸다.
다양성과 포용을 버린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리 있을까. 곳곳에 갈등이 넘쳐난다.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남녀가, 최저임금제와 52시간 근로제를 놓고는 좌우가, 국민연금을 둘러싸고는 노소(老小)가 서로에게 돌팔매질을 한다. 배려와 역지사지는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는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Devil is in detail)’는 말은 원래 ‘신(God)은 디테일에 있다’는 문구에서 나왔다. 악마가 신이 되고 신은 악마가 된다.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개구리의 눈에는 가깝고 낮게 있는 사물이 크고 길어 보인다. 대신 높고 멀리 있는 것은 작아지고 희미해진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개구리는 그 덕분에 연못 표면이나 그 위를 나는 곤충을 잡을 수 있다. 개구리에게는 그게 진리고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말한다. 참이 소중한 만큼 거짓도 소중하고 진리가 중요한 만큼 허구도 중요하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총선기획단에 27세 청년이 들어왔다. 한때 박정희·이명박 전 대통령을 존경했던 청년이었다. 그가 말했다. “진보·보수 개념은 낡은 개념”이라고.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에서는 조국 사태와 관련한 지도부의 대응을 비판하면서 지도부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시민단체=여당 편’이라는 등식을 깼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양분법에 금이 가는 소리다.
다른 것은 틀린 게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의문과 시도로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27세의 청년이, 시민단체의 내부 비판자가 더 많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혁신이 가능하고 ‘타다’가 ‘내리다’로 되는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수년 전 북악산에서 쌍무지개를 본 적이 있다. 일곱 가지 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구름다리를 만들던 그 모습, 잊을 수 없다. 세태 탓일까. 요즘은 그런 무지개를 도통 볼 수가 없다. 다양한 색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그 무지개, 다시 한번 보고 싶다.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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