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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한국판 CSI 나제성 반장 "과학수사는 보이지 않는 범인과 사투"

■ '1세대 과학수사관' 나제성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반장

드라마 '수사반장' 보며 형사 꿈꾸던 소년

1999년 팀 창설 멤버로 과학수사 길 걸어

아무리 힘들어도 피해자·유가족 볼 때면

범인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증거 찾았을 땐 피로도 눈 녹듯 풀리죠

사건현장서 몸에 밴 냄새 가족에 풍길까

퇴근할 때면 고깃집서 '연기 샤워'하기도

나제성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대 반장이 현장 감식 때 사용하는 후레쉬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오승현기자




지난 2000년 미국에서 첫 방영된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는 전 세계적인 히트와 동시에 국내에 ‘미드(미국드라마)’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동안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영역이던 과학수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드라마 속 주인공인 길 그리섬 반장은 사건 해결을 위해 주관적인 감정이나 상상은 배제한 채 ‘증거’에만 몰두한다. “인간은 거짓말을 하지만 증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지론 때문이다. 철저한 증거수집과 분석을 통해 CSI 과학수사대는 사건 해결의 마침표에 한 걸음씩 다가간다.

영원한 미제사건으로 묻힐 뻔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유전자(DNA) 분석의 힘으로 33년 만에 실체가 밝혀지면서 국내에서도 과학수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사의 단서와 결정적 증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과학수사는 모든 사건의 시작인 동시에 사건 해결의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하지만 갈수록 범죄가 지능화되면서 범인과 과학수사관 사이의 숨바꼭질도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사건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과학수사요원들은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는 믿음을 가슴 속에 품고 오늘도 눈에 보이지 않는 범인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대 소속 나제성(52·사진) 반장(경위)은 ‘국내 1세대 과학수사관’으로 통한다. 1990년 경찰에 입문한 그는 1999년부터 만 20년을 과학수사에 매달려온 베테랑 수사관이다. 실제로 강력사건 감식현장에서 그보다 더 오랜 경력을 가진 이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지금은 경찰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고 있지만 몸이 워낙 허약했던 어린 시절만 해도 강인한 체력이 필수인 경찰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체력을 키우기 위해 시작한 합기도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나 반장은 “합기도에 재미가 들려 1년 3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했다”며 “몸이 튼튼해지니 ‘경찰이 되고 싶다’는 꿈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그의 합기도 실력은 공인 6단이다. 지금도 쉬는 날이면 짬을 내 합기도를 수련하고 있다.

나제성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대 반장이 지난 9월24일 서울 중구 제일평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감식 작업을 하고 있다./성형주기자


1970~1980년대 국민 드라마 ‘수사반장’을 보면서 형사의 꿈을 키워나간 소년은 어느덧 성인으로 자라 합기도 사범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경찰시험을 준비했다. 1990년 스물넷의 나이에 드디어 순경 공채에 합격해 꿈에 그리던 경찰 제복을 입을 수 있게 됐다. 공교롭게도 그가 경찰에 입문하던 해,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경찰 총동원령을 내리는 바람에 경찰종합학교(현 중앙경찰학교)에서 4주만 교육받고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며 “이후 나머지 교육을 받으러 다시 입교하면서 임용교육을 두 번 받은 유일한 기수”라고 떠올렸다.

‘내 손으로 범인을 잡고 싶다’는 꿈을 품고 경찰에 입문한 그가 어떻게 범인 직접 검거와는 거리가 먼 과학수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을까. 1999년 경찰은 기존의 ‘감식과’를 ‘과학수사과’로 확대 개편하면서 국내에도 과학수사의 개념이 본격 도입됐다. 당시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근무하던 나 반장은 과학수사팀 창설 멤버로 합류했다. 그는 “범인을 직접 검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 동료 형사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과학수사만의 매력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과학수사팀이 꾸려졌지만 제대로 된 장비도 부족하고 축적된 경험도 일천하다 보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감식기술을 배우려고 해봤자 교본이 전부였죠. 그래서 서울경찰청 내에 만들어진 법의학 감식동호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법의학자와 과학수사관·형사들이 한데 모여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함께 연구하며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난상토론이 100회 넘게 이어지다 보니 지문채취와 DNA 감식 등 여러 분야에서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1세대 과학수사관들의 열정 덕분에 국내 과학수사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톱클래스’ 수준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나 반장은 “지금 한국의 과학수사는 ‘오픈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범죄정보와 수사 노하우가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져 공유되고 있다”며 “이제는 해외에서 오히려 과학수사 기법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나 반장이 현장감식에 참여했던 ‘2011년 마포 만삭 의사 부인 살인사건’은 과학수사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 사례로 기록된다. 당시 용의자로 지목된 남편은 외국의 유명 법의학자까지 동원해가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사건 현장의 증거물과 혈흔 등을 치밀하게 분석한 경찰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는 “현장의 증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라고 평했다.

최근 들어 과학수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경찰 내부에서도 과학수사관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나 반장은 “처음 과학수사를 할 때만 해도 업무 강도가 세고 처우도 열악한 ‘3D’ 직종으로 여겨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며 “하지만 요즘에는 1명의 과학수사관을 뽑는 데 20~30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전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다만 그는 “여전히 ‘일선 수사팀은 주연이고 과학수사팀은 조연’이라는 인식 탓에 과학수사관들이 승진에서 소외되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덧붙였다.

나제성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대 반장이 청사 내 사무실에서 현장 감식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오승현기자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과학수사관들은 남모를 애환을 안고 살아간다. 나 반장을 포함한 과학수사관들은 오전8시30분에 출근해 다음날 오전9시까지 꼬박 24시간을 일한 뒤 이틀을 쉬는 교대근무체제로 돌아간다. 물론 퇴근 무렵 사건이 터지면 귀가 시간은 기약할 수가 없다. 서울경찰청 소속 현장감식요원들은 강도·절도·성폭력·살인 등 강력사건에 주로 투입되다 보니 한번 출동하면 짧게는 2~3시간에서 길게는 7시간 넘게 현장을 지켜야 한다. 나 반장은 “사건이 언제 터질지 모르니 제때 끼니를 챙겨 먹는 것은 사치”라며 “사인 불명의 변사사건이 늘면서 출동 건수도 잦아지는 추세”라고 전했다.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대형 재난사고의 경우 이들이 겪는 고통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나 반장은 “수많은 시신과 유가족이 오열하는 모습을 계속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멘탈’이 무너질 때가 있다”며 “큰 사건을 끝마치고 나면 혼자 등산을 가거나 동료들과의 격한 운동으로 땀을 흘리면서 각자 치유의 시간을 가진다”고 말했다.

매일 같이 고된 업무에 시달리지만 정작 사랑하는 가족 앞에서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는다. 20년간 과학수사관의 가족으로 살아왔지만 아내와 자녀들은 얼마 전 나 반장이 출연한 리얼리티 방송 프로그램 ‘도시경찰’을 보고서야 남편과 아버지의 직업을 제대로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워낙 극한상황에서 일하다 보니까 식구들에게 자세한 얘기를 해주기 어려워요. 저뿐만 아니라 감식요원들은 사건 현장의 냄새가 밴 옷을 집에서 빨기가 미안해 사무실 세탁기를 이용하죠. 옷을 갈아입고 씻어도 냄새가 지워지지 않을 때는 일부러 숯불고깃집에 가서 소주 한잔 마시면서 고기 굽는 연기로 샤워하고 집에 돌아갑니다. 사건 현장에서 밤낮을 지내느라 가족들과 보낸 시간이 너무 적었던 게 후회되고 미안할 따름이죠. 그래서 지금은 1년에 한 번이라도 꼭 가족여행을 다니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힘들고 고단한 길을 20년째 묵묵히 걷고 있는 이유는 뭘까. 나 반장은 “아무리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어도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보면 사건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며 “범인을 검거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 법정에 세워 유죄판결을 이끌어내는 순간 그동안 쌓였던 모든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과학수사의 발전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진화하는 범죄수법 탓에 과학수사관들은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나 반장은 “갈수록 범인들도 완전범죄를 위해 사건 현장을 말끔히 치우고 간다”며 “앞으로 과학수사관을 꿈꾸는 후배들은 작은 흔적조차 사라진 범죄현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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