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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설계 따른 '금영 측우기' 국보 된다

현존 유일 조선시대 측우기

선화당·창덕궁 측우대도 국보로

국보 승격이 예고된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 /사진제공=문화재청




세계가 인정한 강수량 측정 기구인 측우기가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근대기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는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와 조선 시대 측우제도를 계통적으로 증명해주는 2점의 측우대인 보물 제842호 ‘대구 선화당 측우대’와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를 국보로 지정한다고 30일 예고했다.

지난 1971년 보물로 지정된 ‘금영 측우기’는 국보로 승격되면서 ‘공주감영 측우기’로 이름이 바뀔 예정이다. 원소재지를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다. 조선은 세종 때인 1442년 농업에 활용하고자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했다. 당시 유물은 전해지지 않으나 그 전통은 이후로 꾸준히 이어졌다.



국보로 지정 예고된 ‘금영 측우기’는 충남지역 감독관청이던 공주감영에 설치돼 있었다. 바깥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1837년(헌종 3년)에 만든 것으로 높이 31.9㎝, 지름 14.9㎝이며 무게는 6.2㎏이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라 조선 측우제도 계승을 보여주는 사료로 의미가 크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가 이 측우기를 일본으로 가져갔으나, 1971년 국내로 환수돼 지금은 서울 기상청에서 보관 중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조선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며 “와다 유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국내에 알려진 측우기는 5기, 측우대는 총 10기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금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세종 대 확립된 측우기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쳐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770년(영조 46년)에 부활했다. 영조는 세종 때의 척도를 고증해 팔도에 측우대를 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지난 1985년 보물 제842호로 지정된 ‘대구 선화당 측우대’이다. 보물 제844호 ‘창덕궁 측우대’는 정조 때인 1782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들 3점의 유물은 30일의 예고기간을 걸쳐 국보로 지정될 예정이다.

서양에서는 우리나라보다 220년 늦은 1662년에 영국인 크리스토퍼 렌이 최초의 서양식 우량계를 만들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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