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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의 도전과 오만 사이…죽음은 확실하나 삶은 모호하다

[박상진의 문학으로 쓰는 이야기]

■오디세우스의 모험







오디세이아 표지


호메로스의 두상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트로이전쟁 후 귀향길 놀라운 모험담

☞호메로스, 역경 도전 오디세우스 표현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경 구술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도시 이타카의 군주였다. 꽤나 흥미로운 캐릭터라서 호메로스 이래 많은 작가가 변용하여 다루기도 했다. 호메로스는 10년이나 끌던 트로이 전쟁을 이른바 ‘트로이의 목마’로 끝낸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다채롭고 놀라운 모험으로 상상한다. 오디세우스는 당시 세상의 끝으로 알려진 지브롤터 해협까지 방랑하다가 이타카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 귀향길은 끝도 없는 우회의 길이었다. 그래도 그는 길 위에서 언제나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존엄을 한껏 드높인다. 정착을 유예하고 역경에 도전하는 모습은 인간 자유 의지의 표상이다.

길 위의 오디세우스가 벌이는 모험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두꺼운 ‘오디세이아’의 반만 채울 뿐이고, 나머지 반은 이타카에 돌아간 이후의 사건으로 채워진다. 그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돌아가지 못한다. 자기 아내를 못살게 구는 구혼자들의 위협을 피해 변장을 하기도 하다가, 다양한 기지와 계략을 동원하여 마침내 제 자리를 찾는다. 완전한 귀향은 ‘오디세이아’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끝없는 모험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표지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로마 건설 정착자 아이네이아스와 비교

☞베르길리우스, 또다른 인간 군상 묘사

호메로스로부터 800년쯤 지나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아이네이아스라는 인물을 구상한다. 트로이를 사수하며 용맹을 떨치던 아이네이아스는 오디세우스의 목마 계략으로 트로이가 함락되자 탈출하여 지중해를 떠돈다. 그도 오디세우스처럼 길 떠나는 인간의 표상이다.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를 뿌리치고 떠나는 것이 좋은 예다. 그는 모험의 항해 끝에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마침내 로마 제국을 건설한다.

다시 1300년이 지나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신곡’에서 오디세우스와 아이네이아스를 자신의 시각에서 비교한다. 단테가 볼 때 오디세우스는 방랑자인데 비해, 아이네이아스는 정착자다. 오디세우스는 키르케를 떠나는 이유가 늙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반면,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를 업고 트로이를 탈출하며 각별한 효심을 내비친다. 오디세우스는 이탈리아 남부 어느 곳을 방문하고 별말 없이 그냥 떠나지만, 아이네이아스는 자기 유모 이름을 따서 그곳을 가에타라 명명한다. 오디세우스는 아버지를 넘어서지만, 아이네이아스는 아버지를 이어받는다. 오디세우스는 미지의 세계에 이름을 붙이지 않지만 아이네이아스는 이름을 붙인다. 오디세우스는 타자의 세계를 그대로 두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자꾸 나아가는 반면, 아이네이아스는 자기에게 익숙한 삶의 패턴을 타자의 세계에 덮어씌운다.

단테의 ‘신곡’ 표지




■단테 ‘신곡’

☞단테는 ‘신곡’서 새 오디세우스 상상

☞지브롤터 해협 건너 금단의 땅 향해



☞남극 가자 죽어서 죄 씻는 ‘연옥’이…

단테는 ‘신곡’에서 아이네이아스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오디세우스를 상상한다. 여기서 잠시 해롤드 불룸이 말한 ‘영향의 불안’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자. 독창성은 작가의 생명이다. 그런 만큼 모든 작가는 모르는 사이에 다른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단테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신곡’에 등장시켜 나름의 변형을 가하고, 호메로스라는 거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자 한다. 말하자면 단테는 불안을 오히려 독창성으로 바꾼 좋은 사례다. 우리에게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있다면 단테의 오디세우스도 있다.

단테가 변주한 오디세우스는 ‘신곡’ 중 [지옥] 26곡에서 자세히 묘사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기도 전에 뱃머리를 돌려 집으로 향했지만,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해협을 주저 없이 통과해버린다. 생각해보라.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에 다다른 15세기 말 이전까지 인간이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이 세워진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해협 저편의 대서양은 언제나 높은 파도가 넘실대는 금단의 지평이었다. 대항해의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를 쓴 포르투갈의 카몽이스가 유라시아 대륙 서단의 땅끝 마을 카보 다 호카에 ‘여기서 땅이 끝나고 물이 시작한다’는 멋진 문구를 남겼듯, 대서양은 인간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그런데 단테는 14세기 초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는 오디세우스와 그 부하들을 상상했다. 대서양 항해의 상상은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보다 무려 200년 정도 앞선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획기적이었지만, 단테가 주는 경이로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단테는 오디세우스의 배가 대서양으로 나가 거친 물결을 헤치며 왼쪽으로 향한다고 묘사한다. 왼쪽이라면 남쪽이고 그 끝은 남극이다. 남극까지 이르는 오랜 항해에 부하들은 동요한다. 지친 그들에게 오디세우스는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생각하라는, 짧지만 강렬한 연설을 한다. 그러자 부하들은 미친 듯이 노를 저어 항해를 이어간다.

항해하는 오디세우스와 부하들




■‘오디세우스의 배’

오디세우스의 배는 마침내 남극 근처에 이르러 바다 위에 솟아오른 거대한 산과 마주한다. 단테가 연옥이라 상상하는 그곳은 죽어서 죄를 씻는 곳이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들은 지옥으로, 씻을 수 있는 죄를 지은 자들은 이곳 연옥으로 와서 천국으로 오르는 고행을 겪는다. 세상에서 지은 죄를 죽어서 씻고 천국에 오른다는 단테의 파격적인 구상은 상인 중심의 시민 계급이 사회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하던 당대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죄를 저승에서 씻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존재는 여전히 하느님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하느님의 허가증 없이 연옥에 도달해 인간의 의지만으로 구원을 성취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배는 연옥의 산이 빤히 바라보이는 앞바다에서 침몰한다. 단테는 오디세우스의 도전을 파국으로 설정하면서 그에게 오만의 죄를 묻는다. 도전이란 조절하면 자부심이 되지만 지나치면 오만이 된다. 이런 생각은 연옥의 산기슭에 도착한 단테가 겸손의 상징인 갈대를 허리에 두르는 장면에 그대로 투영된다. 연옥에 도달하는 데 실패한 오만한 오디세우스와 달리 단테는 겸손으로 무장하고 연옥을 통과해 천국까지 오른다.

단테는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미친 날아오름’이라 표현한다. 단테의 눈에 오디세우스는 이성을 상실할 만큼 무모한 도전자였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은총을 거부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서쪽으로 향하는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단테는 어두운 숲에서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저승 여행을 시작할 때 자신의 여행이 ‘미친’ 짓이 아닐까 의심한다. 사실상 단테의 여행은 그 의심을 지우는 여행이다.

단테가 상상한 연옥




■‘미친 날아오름’과 겸손

☞‘미친 날아오름’ 도전, 한계 넘었지만

☞겸손 없는 오만함…죄 못씻고 나락에

어쩌자고 단테는 자신과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미친’이라는 똑같은 용어로 묘사했을까. 단테는 자신이 변형한 오디세우스를 부러움과 비난의 이중적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단테는 오디세우스의 ‘미친’ 열정, 초월적 절대자에게 끝내는 굴복할지언정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감행한 시도를 부러워했다. 아마도 단테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문명을 이룬 인간 진화의 원동력이 그 ‘미친 날아오름’이었음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린 궁극의 결론은 겸손이었다. 그렇기에 오디세우스를 지옥의 깊숙한 곳에 두면서 오만의 죄를 묻는 것이다.

나는 겸손을 강조하는 단테의 결론이 진화의 끝에 다다른 우리 현대인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초월적 가치에 대한 경외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우리 인간의 생존에 직결되는 이 시대에 말이다. 단테는 오디세우스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는 오만의 죄를 지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오만이란 정확히 말해 선을 넘는 과잉의 모험보다는 그 모험에 대한 성찰과 책임의 부재를 가리킨다. 미지를 정복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문명을 최고의 단계로 올려놓았지만, 그 부작용은 인간 문명을 종식시킬 만큼 심각해지고 있다. 단테가 오디세우스에게 물었던 오만의 죄는 그 부작용에 눈을 감아버리는 둔감과 무지를 뜻한다. 2,800년 전에 호메로스가 상상하고 700년 전에 단테가 변형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인간 문명의 끝자락에 선 지금 우리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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