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 '갈라진 에도'에 등장한 이이 나오스케, 통상문 열고 쇼군 후계도 해결

<통상조약 체결과 일왕의 등장>

美 해리스 '애로호 사건' 이용 日 압박

실세 홋타, 개항 추진했지만 일왕 거절

후계 문제로 에도 정계 혼란에 빠지자

막부, 나오스케 영입해 비상시국 맡겨

칙허없이 美와 조약 체결·후계자도 결정





페리를 떠나보내고 막부는 ‘선방’했다고 생각했다. 미국과 조약(미일화친조약)은 맺었지만 통상도, 외교관계도 피하고 기항지만 내준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막부의 희망과는 달리 일본이 통상도 허용했다고 오해한 서양 선박들이 줄지어 곳곳의 일본 항구를 찾았다. 부지불식간에 사실상의 교역이 조금씩 행해지게 됐다. 그런 가운데 막부 관리들은 ‘세계의 대세’를 직감했다. 홍콩에 있던 영국 총독이 압력을 가해왔고, 러시아 사절도 나타났다. 페리가 떠난 지 2년여 만에 마침내 미국 정부가 파견한 타운센드 해리스가 총영사 자격으로 시모다항에 나타났다. 그는 외교관인 자신은 마땅히 수도인 에도에 주재해야 하며 쇼군을 알현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나가사키에서는 러시아·네덜란드·영국과의 교섭이 진행되고 있는 때였다.

애로호사건으로 불리는 제2차 아편전쟁.


해리스는 때마침 중국에서 터진 ‘애로호사건’을 최대한 이용해 위협했다. 중국을 혼내준 영국 함대가 일본을 개항시키러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은 더욱 나쁜 조건으로 통상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미국과 먼저 조약을 맺는다면 자신이 나서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도 알선하겠노라고. 지루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는 와중에 로주 아베 마사히로가 죽자 2인자인 ‘서양 마니아’ 홋타 마사요시의 발언권이 커졌다. 홋타가 보기에 이제 태평시대는 끝나고 세상은 전국시대가 돼버렸다. “지금 만국의 형세가 일변해 대체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일본의 전국시대와 비슷한 상황이 됐다. 모두가 각각 영토에 할거해 스스로 제왕이라고 칭하며 패권을 잡으려고 한다.” 그는 당대를 각국이 서로 패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시대로 파악했다. 그 후의 제국주의 침략전쟁, 식민지화, 제1·2차 세계대전 등등을 떠올려보면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전국시대가 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 혼자 평화롭게 쇄국하며 살겠다고 그게 유지될 턱이 없다. 결국 좋든 싫든 부국강병에 힘쓸 수밖에 없다. 홋타는 개국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개국을 훗날 세계를 통일할 기초로 삼자. 널리 만국에 항해하고 무역을 하며 서양인들의 장점을 취해 우리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국력을 기르고 국방을 튼튼히 하자.” 그런데 홋타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리하면 장차 전 세계가 일본의 위엄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만국이 일본을 세계만방의 대맹주로 떠받들고 일본의 가르침을 받들며 일본의 명령을 받게 될 것이다.” (이상 ‘대일본고문서:막말외국관계문서(大日本古文書: 幕末外國關係文書)’에서)

당시 일본의 국력을 생각하면 이는 망상에 불과했다. 누구보다도 세계와 일본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홋타가 왜 이런 과대망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개국에 반대하는 세력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런 ‘해외팽창론’은 그 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결국 태평양전쟁의 참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망상은 현재도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다. 아직도 일본인들 중에는 일본이 세계적인 대국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중국에 적대적이다. 일본은 중국에 버금가는, 혹은 능가하는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조금만 곱씹어보면 비현실적인 생각에 진지한 관심을 보인다. 한국인들 중에는 이 정도의 망상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한국과 일본은 문화와 경제·교육·기술로 세계에 공헌하는 강중국·강소국이 되면 안 되는 것일까.

일본에 통상을 압박한 미국의 초대 총영사 타운센드 해리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다. 해리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한 홋타는 또 하나의 결단을 내린다. 반대여론을 억누르기 위해 일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일왕의 칙허를 얻기 위해 직접 교토로 갔다. 도쿠가와 시대 내내 일왕에게는 정치권력이 없었다. 군사력도, 경제력도 없었다. 그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정신적 권위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모든 정치 사안을 막부가 도맡아 처리해왔다. 대정위임(大政委任)이다. 외교를 포함해 정치 문제에 대해 일왕의 의견을 묻는 것도, 하물며 허가를 구하는 일도 없었다. 이런 전례를 깨고 홋타는 교토행을 단행한 것이다. 여기에는 압도적 권력자인 막부의 요구를 일왕이 거부하지 못하리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있었다. 교토 나들이나 하며 가볍게 칙허를 얻고 돌아오겠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그의 앞에는 파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왕은 36세의 고메이(孝明) 일왕이었는데, 그는 홋타가 생각한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초부터 일왕들은 ‘일본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군주의식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은 유학경서와 역사서를 읽고, 신하들과 열심히 토론했다. 이들의 공부 스케줄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이런 ‘열공’ 분위기 속에서 교토의 분위기도 변해 있었다. 일왕도 그의 신하인 공경(公卿)들도 기회만 오면 정치와 천하대사에 간여할 의욕에 넘치고 있었다. 막부와 홋타는 이를 간과했던 것이다.



홋타의 상경에 대해 고메이 일왕은 놀라운 말을 했다. “(홋타가 상경해서) 아무리 거금의 선물을 뿌리더라도 거기에 눈이 먼다면 천하의 재앙이 될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란 금전에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번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실로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유신사(維新史)’ 2권).” 그러면서 자신도 헌상물을 일절 안 받고 막부에 돌려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도쿠가와 시대에 일왕과 조정 공경들은 경제력이 형편없었다. 당시 막부의 금전적 지원이나 선물은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런데도 고메이 일왕은 신하들에게 이를 거부하라고 한 것이다. 홋타가 가져올 개국 요구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배수진이었다.

이로부터 몇 달 동안 대소란이 벌어졌다. 상급공경들은 궁궐 내에서 서로 싸웠고, 하급공경들은 떼를 지어 데모를 벌였다. 전에 없던 일이다. 수백 년 동안 정치적으로 동결돼 있던 교토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홋타는 일왕의 칙허를 받지 못한 채 에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그 사이 에도에서도 큰일이 있었다. 쇼군 후계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당시 쇼군 이에사다는 34세로 아직 젊었으나, 어려서부터 허약해서 누가 보더라도 자식을 볼 가능성이 없었던 듯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다가 이때 본격화한 것이다. 후계 문제는 에도 정계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권력핵심에서는 쇼군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기이번(紀伊藩)의 요시토미(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밀었다. 당시 나이 불과 12세.

반면 그동안 권력에서 소외돼왔던 다이묘들과 막부 내 비판세력들은 요시노부(훗날의 15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했다. 요시노부는 당시 21세로 건장하고, 무엇보다 총명하기로 소문이 난 청년이었다. 다만 그에게는 결정적 약점이 있었다. 바로 친부가 도쿠가와 나리아키라는 점이다. 나리아키는 종친의 한 사람이면서 집요하게 막부 정책을 비판하던 사람이었다. 페리가 왔을 때도 막부를 공격하며 미국과의 화친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다. 게다가 그는 재정을 국방에 쏟아야 한다며 오오쿠(大奧, 쇼군의 후궁)에 들어가는 경비의 대폭 삭감을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오오쿠는 심신 모두 비정상이었던 쇼군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본 왕이 살던 왕궁인 교토 고쇼(京都 御所).


이처럼 요시토미와 요시노부를 후보로 놓고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막부는 돌연 히코네번(彦根藩) 다이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를 다이로(大老)로 영입했다. 막부에는 로주 5명 내외가 총리 격으로 있었는데 이 로주들은 중소 규모의 영지(5만~10만석)를 갖는 다이묘 중에서 선발됐다. 너무 큰 다이묘가 로주직까지 맡으면 쇼군의 권력을 위협할 것을 우려해서다. 이 때문에 정작 큰 다이묘들은 막부 요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다만 비상시라고 여겨질 때는 다이로를 둬 로주를 지휘하게 했다. 이이 가문은 무려 30만석의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다른 로주 집안과는 급이 달랐다. 이 거물에게 비상시국을 맡긴 것이다.

1858년 초여름 다이로가 된 이이 나오스케는 단 두 달 만에 조약체결과 후계 문제를 해결해버렸다. 조약(미일통상조약)은 일왕의 칙허를 받지 않고 체결했다. 이로써 일본은 서양 주도의 국제체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우리가 일본과 개항조약을 맺은 것은 1876년(강화도조약), 서양과는 그보다도 늦은 1880년대 초였다.

조약체결과 거의 동시에 쇼군의 후계자도 요시토미로 결정해버렸다. 요시노부를 밀던 다이묘들은 에도성에 몰려들어 거칠게 항의했으나 일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오히려 다이로는 허가도 받지 않고 에도성에 들어왔다며 이들을 처벌했다. 도쿠가와 시대 통틀어 사상 최대 정변(안세이의 대옥)의 시작이었다. 정변에 자극받아 전국에서 사무라이들이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유신지사(維新志士)’의 등장이다. 이 가운데는 저 멀리 조슈번(長州藩)의 한 열혈청년도 있었다. 이름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이제 이 젊은이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