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시간) 오후9시를 조금 넘긴 시각, 방송화면에 잡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에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자리에 앉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대국민성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미국은 안전하다”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던 것과 크게 달랐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30일간 유럽에서의 미국 입국금지라는 예상 외의 카드를 꺼냈다. 당초 외신들은 미국 정부가 유럽 전역에 3단계 여행경보(여행재고)를 내릴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를 뛰어넘은 것이다. 일각에서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유럽발 입국을 차단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미국과 유럽의 무역규모는 연간 1조1,000억달러(약 1,325조7,000억원)로 세계 최대다. 유럽에서의 미국 입국이 금지될 경우 교역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초강수를 둔 것은 재선을 위해서는 코로나19의 미국 내 확산을 막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미국은 수출 의존도가 12%에 불과하고 소비가 경제의 70%를 차지해 내부 단속과 적절한 부양책이 효과를 내면 경기침체를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날 월가 금융사 경영진과 만난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을 ‘코로나19의 온상’이라고 부르면서 “국경이 없어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실제 미국 내 상황은 유럽에서의 입국을 막아야 할 만큼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부의장을 지낸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교수는 “데이터 시스템이 잡아내는 것보다 쇼핑 분야는 빨리 가라앉을 것”이라며 “경기침체가 올 가능성은 90%로, 이미 시작됐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현장에서는 코로나발 감원도 시작됐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미국에서 물동량이 가장 많은 항구 가운데 하나인 로스앤젤레스(LA)의 ‘시퍼스 트랜스포트 익스프레스’사는 화물 운전사 145명에게 해고 통보를 했다. 평소 월마트 제품을 포함해 매일 밤 1,000개가량의 컨테이너를 운송했는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중국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지금은 200개로 줄었기 때문이다. 애틀랜타와 LA의 여행사는 여행취소로 근로자 여러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올랜도의 무대 조명회사도 전국적인 행사취소에 100명을 해고한 데 이어 추가로 150명을 내보낼 계획이다. 이대로라면 ‘고용축소→소비감소→경기둔화’의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확정되지 않은 경제대응책을 서둘러 발표한 것도 행정부의 다급함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금납부 유예 △저금리 중기대출 △바이러스 감염 근로자 지원 △급여세(payroll tax) 인하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이미 충분히 알려진 것들이라는 점에서 금융가의 반응은 차가웠다. 대책의 핵심인 급여세의 경우 구체적인 방안과 시기가 나오지 않았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도 “초기에 코로나19의 영향이 과소평가됐다”고 시인했다. 그러면서 “(경기부양책을) 의회와 48시간 이내에 합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며 “세금감면과 대출보증, 임금손실을 본 근로자들에 대한 보상, 항공·호텔·여행 업계에 대한 지원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전했다.
통화·금융당국이 추가 행동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은 시장을 확실히 진정시킬 만한 수준이 못 된다. 연준은 12일부터 하루짜리(오버나이트) 초단기 유동성을 공급하는 환매조건부채권(Repo·레포) 거래 한도를 기존의 1,500억달러에서 1,750억달러로 확대하기로 했다. 므누신 장관은 또 23일 제롬 파월 연준 의장과 뉴욕 연은 총재,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이 참석하는 공식 회의를 열고 코로나19에 따른 시장과 경제 영향을 점검할 예정이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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