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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는 기술전쟁 코어, "敵에게 넘기느니 내가 품겠다"

[이상훈의 재미있는 반도체 이야기]

'기술패권이 곧 세계패권' 인식 커지며

반독점 심사 앞세워 M&A 견제 나서

'美퀄컴, NXP 인수' 中몽니에 결국 불발

日장비기술, 中 눈독들인다는 우려에

美업체 서둘러 해당 기업 사들이기도

獨인피니온 + 사이프러스 美승인 불구

中 '서구권 합병' 반감 어깃장 놓을수도





지난해 6월 반도체 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수합병(M&A) 발표가 있었다. 바로 차량용 반도체 분야 세계 2위 업체인 독일의 인피니온이 미국 전력 반도체 회사 사이프러스를 90억유로(약 12조원)에 사들이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최근 미국 당국이 이 ‘메가딜’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기사가 영국의 정보기술(IT) 매체 ‘일렉트로닉스위클리닷컴’에 보도돼 또 한번 주목을 끌었는데, 결국 오보로 확인됐다. 이 보도가 나오고 딱 닷새 만인 지난 11일 인피니온이 미국의 승인을 받았다고 공식 발표했기 때문이다.

시장 일각에서는 독일이 미국의 화웨이 제재에 적극적이지 않아 미국 정부가 인피니온의 인수 시도를 무위로 돌릴 수 있다는 관측이 있었다. 실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줄곧 특정 업체를 독일 5세대(5G) 이동통신망 사업에서 배제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밝혀왔다. 독일 최대 이통사인 도이체텔레콤·텔레포니카 등은 이미 화웨이와 5G 네트워크 장비 계약을 체결하는 등 화웨이에 우호적이다. 독일로서는 막강한 자금력을 등에 업은 중국의 투자, 중국에서 활동하는 자국 기업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이런 독일의 행보에 미국이 유쾌할 리 없다. 그런 만큼 인피니온과 사이프러스 간 계약으로 불똥이 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적지 않았다. 인피니온으로서는 미국의 승인을 얻어 8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이제 계약 종료까지는 중국 당국의 OK 사인만 남았다. 그런데 중국 당국도 손쉽게 승인해줄지는 미지수다. 원래 중국 기업도 사이프러스 인수전에 참가했다 물먹은데다 중국 당국으로서는 서구권 우방국끼리의 M&A에 반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피니온 사례에서 보듯 반도체 M&A가 성공하려면 첩첩산중의 험로를 거쳐야 한다. 국가 기간산업인 반도체가 갈수록 중요해지면서 각국 정부의 심사도 이전보다 몰라보게 깐깐해지고 있다.



실제 지금 반도체 시장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관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협력 불가피론이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마냥 싸울 수가 없다. 화웨이 통신장비를 아예 안 쓰면 이미 4G까지 화웨이 장비로 통신망을 구축한 미국 중소형 통신사의 상당수가 어려워진다. 그뿐인가. 우리나라를 상대로 한 일본의 소재 수출금지 규제 때도 유사한 문제가 많이 나타났다.

한편으로 반도체 시장에서는 적과 아군, 내 편과 남의 편을 확실히 가르는 추세가 노골화하고 있다. 반도체는 미래 기술전쟁의 코어다. 이제는 기술패권을 가진 나라가 세계 패권을 쥐게 된다. 반도체를 아무에게나 내줄 수 없다. 특히 자국의 매물을 다른 나라에 넘긴다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심층면접은 필수다. 이 때문인지 1조~2조원 안팎의 자잘한 M&A는 많아도 10조원을 웃도는 대형 딜은 확연히 줄어들고 있다.



메가딜이 수포로 돌아간 사례는 많다. 2015년 중국의 칭화유니그룹이 미국의 마이크론을 230억달러(약 28조원)에 공개 매수하겠다고 나섰다가 뜻을 접어야 했다. 2018년에는 원래 미국 회사였지만 싱가포르 기업인 아바고에 인수되며 사실상 범중국계 기업이 된 브로드컴이 세계 최고의 칩 업체인 퀄컴을 상대로 시도한 적대적 M&A도 무산됐다. 모두 중국으로의 기술유출을 좌시할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우려가 작용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열 받은 중국은 응수 격으로 미국 퀄컴의 네덜란드 업체 NXP 인수 승인을 거부했다. 퀄컴의 NXP 인수는 규모만 440억달러(약 50조원)에 이른다. 원체 매머드급 M&A여서 많은 나라에서 반독점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미국·일본 등 8개 국가가 모두 승인한 것과 달리 중국이 유일하게 비토하면서 결국 실패한 것이다.

반도체 장비 쪽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7월 반도체 장비 분야 1위 업체인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가 일본의 장비 업체 고쿠사이일렉트릭을 먹은 것이 대표적이다. 인수금액이 2,500억엔(약 2조6,700억원)이었다. 사실 이 고쿠사이도 애초에 중국 기업이 눈독을 들였고, 그래서 중국 기업에 팔릴 가능성이 컸다.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로부터 장비 수입도 안 되는 중국으로서는 일본 장비 업체를 사들이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성사가 안 됐다. 중국 업체가 고쿠사이를 인수해 기술이 유출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미국 업체가 서둘렀다는 관측이 시장에서 나왔다.

이제 반도체는 기업 인수가 쉽지 않은 업종이 됐다. 국적이 중요해졌고 보호주의 속에 기술패권 경쟁도 심해지면서 각국 정부 간 코드도 맞아야 한다. 이제 중국처럼 체제가 다른 나라가 서구권 기업이나 일본 등의 기업을 인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중국도 반도체 최대 수요국으로서 반독점 심사를 할 때마다 자국과 관련된 M&A를 해코지했던 미국이나 유럽권 기업의 M&A에 승인을 안 해주는 식으로 몽니를 부릴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미중 무역분쟁의 가장 큰 희생자로 화웨이를 지목하지만 퀄컴도 화웨이 못지않은 희생자로 볼 여지도 있다. 최고의 설계기술을 가진 퀄컴이 차량용 반도체 부문 세계 1위 업체인 NXP를 먹었다면 파괴력이 대단했을 것이다. 퀄컴의 NXP 인수 실패 덕에 삼성전자가 NXP를 인수할 가능성이 죽지 않고 살아 있지만, 이런 질문을 해보자. 만약 삼성이 NXP를 인수한다고 발표하면 많은 나라의 반독점 승인 난관을 무사히 뚫어낼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돈과 의지가 있어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만큼 반도체를 놓고 국가 간 수싸움이 치열하다. 이제 반도체 산업을 이해하려면 국제정치의 역학구도도 신경 써야 하는 시대가 됐다.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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