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인 지난 1918년 봄 미국에서 처음 발생해 2년간 세계적으로 2,500만~5,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차 대전의 전사자가 1,000만여명 가까이 된 것과 비교하면 바이러스가 훨씬 더 많은 인명을 죽인 것이다. 쥐벼룩에서 시작된 페스트(흑사병)가 14세기 유럽 전역을 휩쓸며 유럽 인구의 3분의1을 몰살시킨 후 최대의 재앙으로 꼽힌다.
스페인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언론이 자유롭게 독감 사태를 다루면서 독감 진원지라는 오명을 썼다. 당시 참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은 보도 통제를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포한 세계보건기구(WHO)가 ‘우한 코로나’나 ‘중국 바이러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에 비춰봐도 스페인 독감은 적절하지 않다.
☞스페인 독감
1차 대전중 미군 병사서 시작돼
여름에 사그라들다 가을 재출현
사망자 5,000만명 세계 초토화
여하튼 스페인 독감은 1918년 3월 미국 캔자스주의 농장에 살던 앨버트 기첼이 독감에 걸린 뒤 군에 징집되며 발병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군에 복무한 지 3주도 안 돼 부대에서 1,100여명의 중증환자가 나와 40여명이 사망했고 이후 다른 지역의 군대와 도시로 급속히 퍼진다. 더욱이 그해 4월부터 미군이 1차 세계대전에 본격 참전(총 90만명)해 프랑스에 상륙하면서 2만여명이 숨진다. 영화 ‘1917’에서도 생생히 볼 수 있듯이 불결한 참호와 전장에서 밀집생활을 하고 잘 먹지도 못해 면역력도 떨어진 군인들이 바이러스에게는 최적의 숙주가 된 것이다. 영국군도 바이러스로 인해 3만여명이 숨지자 일부 중증병사를 귀국시켰는데 그해 6월부터 맨체스터를 시작으로 6주도 안 돼 10만명 이상이 감염됐다.
미국과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이 바이러스는 25만여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뒤 그해 8월께 마침내 진정된다. 여름철 온도와 습도가 높아지며 바이러스가 물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해 9월 미국 내 군 기지를 중심으로 돌연변이 독감 바이러스가 재출현했다. 피를 토하며 군인들이 속속 쓰러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을 태운 수송선은 그야말로 바이러스의 배양지가 돼 유럽을 비롯한 세계를 초토화시켰다. 9,000여명을 태운 미군 수송선이 유럽에 도착했을 때 100명 이상이 숨질 정도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11일을 전후해 병사들이 귀향하며 바이러스가 다시 기승을 부린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오년(1918년) 독감’이라고 해 742만명이 감염되고 14만명 가까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대부분 폐렴균에 의한 2차 세균감염이 주원인이었다.
하지만 바이러스에 워낙 많이 감염되다 보니 한 번 독감에 걸린 이들에게 면역력이 생기고 바이러스도 덜 치명적인 형태로 바뀌며 마침내 1920년 말 종식됐다. 2005년 미국의 한 연구팀이 알래스카에 묻혀 있던 한 여성의 폐 조직에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를 분리·재생해 인플루엔자 A형 중 H4N1형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코로나19
기온 낮은곳에서 감염자 급증
추워지면 다시 기승 가능성 커
“이동제한 등에 제한적” 분석도
스페인 독감에 비춰보면 코로나19도 날씨가 따듯해지면 주춤했다가 이후 재출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팀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진자의 90%가 섭씨 3~17도 지역에서 나타났다. 논문 공동저자인 카심 부카리 박사는 “기온이 낮은 곳에서 감염자 수가 급속히 증가했다”며 “미국도 북부가 남부보다 감염속도가 빠르다”고 분석했다. 면역학자인 신의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여름이 되면 가라앉을 수 있지만 겨울이 오면 어디서든 크고 작은 난리가 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코로나19가 풍토병처럼 될 가능성이 있어 조기에 치료제를 개발하고 백신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박쥐에서 유래된 바이러스의 실체를 파악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는 물론 ‘강제 이동제한’을 하는 국가가 많은데다 잘 먹고 위생관리도 철저히 하고 있어 스페인 독감처럼 번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코로나19는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병한 뒤 지난 25일 오전9시 기준 세계적으로 약 40만명이 감염돼 1만8,230명이 숨졌다. 물론 미국과 유럽 등에서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 앞으로 피해 규모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브리핑에서 “코로나19는 초기 경증 상태에서도 높은 전파력을 보이고 퇴치도 어렵다. 장기화할 것”이라고 했다. 일부에서는 하루 50명 이상 감염자가 나온 78개국 데이터를 토대로 “확산속도가 둔화하고 있다. 감염률 둔화는 대유행의 끝이 가까웠다는 것을 의미한다(마이클 레빗 2013년 노벨화학상 공동수상자)”는 주장도 나온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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