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꼭 존재해야 하는지도 질문해봐야 한다.”
지난해 말 모 시중은행 부행장으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체이스맨해튼, 메릴린치 등 내로라하는 민간금융사에 있다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한복판에 영국 금융감독청(FSA) 의장이 됐던 아데어 터너가 쓴 책이었다. 은행산업의 수익성을 걱정하던 그가 추천해준 책의 머리말부터 “은행은 공공정책에 의해 철저히 제어되지 않으면 경제 불안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적혀 있는 데 놀랐다.
이 책이 은행의 해악과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은행은 신용과 통화를 창출해 생산적인 투자를 자극하고 수요를 촉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다만 터너는 수십 년간 경제 성장 속도보다 과도하게 이어진 신용 팽창과 그로 인해 누적된 부채 부담이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지적했다. 적절한 제도 개혁이 없다면 은행을 포함한 현대 금융시스템은 부채를 새로운 투자보다는 이미 있는 자산, 특히 부동산으로 흘려보낸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버블이 터지면 남겨진 부채는 경기침체의 악순환을 불러온다. 터너는 이 고리를 끊으려면 중앙은행이 은행을 통해 돈을 푸는 대신 차라리 돈을 찍어 재정적자를 메우는 것이 낫다는 파격적인 주장도 꺼낸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방아쇠가 된 글로벌 금융시장 충격과 중앙은행의 ‘무제한 양적완화’ 처방을 보면서 터너의 책을 다시 펴봤다. 오랜 기간 초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을 발판으로 ‘일드 헌팅’을 해왔던 시장은 악재가 나타나자마자 무섭게 무너졌다. 빚으로 빚을 내 산 자산이 무너지는 과정에 ‘펀더멘털’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터너의 주장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오랫 동안 초저금리와 부채에 의존해왔던 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해졌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시장은 중앙은행이 과거 규모를 훨씬 넘어선 ‘무제한’ 돈 풀기를 약속하고 나서야 진정됐다. 오랜 저금리의 부작용을 우려하던 전문가들도 당장 급한 불을 끄려면 양적완화가 불가피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선택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이다음부터다. 무한정으로 풀릴 유동성이 생산적인 곳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한 고민이 절실하다. 고통스럽고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구조조정에 대한 구상도 시작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제한 양적완화의 다음 단계는 반복되는 부동산 버블과 금융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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