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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스포츠문화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양이 부르짖던 배외주의자, 서구 맹폭 앞에 근대화 첨병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조슈번의 대전환]

처절하게 '양이' 외치던 조슈번

서양함대에 패하자 태도 돌변

메이지유신 발발전 3년반 동안

외국문물 필사적으로 받아들여

평민 군대로 동원 기병대 만들고

메이지정부의 군대 출발점으로

1864년 8월 교토에서 벌어진 ‘금문의 변’을 그린 일본 우키요에. 이 사건으로 조슈는 결국 패하고, 다수의 존양파가 목숨을 잃었다./사진출처=위키피디아




조슈번은 교토에서 쫓겨났지만 명분은 거머쥐었다. 양이를 주장하다가 탄압을 받았다는 것. 배외주의자가 받는 탄압은 언제나 민심을 격동시킨다. 배외주의는 합리적으로는 옳지 않지만 감정은 그쪽으로 쏠린다. 약소국일수록 더 그렇다. 외세를 받아들이면서 이용하고 도약하는 여유와 능력의 폭이 좁기 때문이다. 그러니 곧잘 배외주의자가 그 사회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를 위해 몸 바친 투사일지언정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투사 너머의 어떤 경지를 제시한 사람이어야만 한다.

당시 조슈와 존양파가 없는 교토에서는 사쓰마를 비롯한 유력 다이묘들이 모여 새로운 권력구상을 시도하고 있었다. 유력 다이묘들이 일왕 밑에 모여 권력기구를 구성하려는 것이었다(參預會議·참예회의). 실현된다면 당장 에도에 있는 막부까지 두 개의 정부가 생길 판이었다. 다이묘들 간의 갈등 끝에 이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양이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번 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전국의 사무라이들이 횡단적으로 연대해 봉기를 일으키려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교토를 탈출한 존양파 공경을 옹립한 세력은 교토 남쪽에서 거병했고 미토번의 사무라이들은 쓰쿠바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모두들 교토에서 쫓겨난 조슈번이 봉기하기를 기다렸다.

다카스키 신사쿠의 초상./사진출처=위키피디아


1864년 여름, 조슈번이 움직였다. 조슈번 다이묘의 억울함을 일왕에게 호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교토로 진격한 것이다. 교토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거의 250년 만이었다. 이미 사쓰마번과 아이즈번 병력이 굳게 지키고 있던 궁궐 근처에서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다. 궁궐 9개 문 가운데 하나인 하마구리문에는 지금도 그때의 탄흔이 남아 있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결국 조슈는 패배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존양파 ‘지사’가 숨졌다. 이를 ‘금문(禁門)의 변’이라고 한다. 이때 아이즈번 편에 서서 자신들을 공격한 사쓰마번을 조슈는 증오했다. 그렇게 견원지간이 된 사쓰마와 조슈를 1년 반 만에 화해시키고 동맹(薩長同盟·삿초동맹)을 맺게 한 사람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다. 탁월한 조정능력이다.

교토의 동쪽 끝에는 ‘유신의 길’이라는 곳이 있다. 한국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바로 뒤편이다. 나지막한 동산에 수없이 많은 묘비가 즐비하다. 이미 입구에서부터 음기가 스산하다. 이 시기 막부타도 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묘다. 사카모토 료마도, 기도 다카요시도 여기에 누워 있다. 이 중에는 금문의 변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다수 있다. 메이지유신 직후 메이지일왕이 만들었다. 문제는 여기에 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 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아시아 침략 과정에서 전사한 이들도 여기에 묻히기 시작했다. 그 수는 수천 명. 이들의 묘를 따라 쭉 내려오다 보면 마지막에 펄 판사의 얼굴이 새겨진 벽을 만나게 된다. 태평양전쟁 후 도쿄재판에서 일본의 무죄를 변호했던 판사다. 이 묘지의 기획은 매우 걱정스럽다.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죽은 ‘지사’들부터 20세기 대외침략전쟁의 전사자까지를 ‘호국의 영령’으로 한데 묶어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였겠으나, 거꾸로 보면 ‘지사’들까지 전범으로 묶어버린 것이다. 기요미즈데라를 방문하시는 독자들께서는 잠시 짬을 내어 이곳을 한번 다녀가시기 권한다. 일본인의 역사인식의 심층이 어떤 모습인지를 엿볼 수 있다. 다만 재미있거나 아름다운 곳은 아니니 나중에 필자 탓을 하실 분은 가지 마시길.



‘금문의 변’으로 조슈는 완전히 역적(일본사에서는 조정의 적이라는 의미에서 ‘조적(朝敵)’이라고 한다)이 됐다. 일왕이 사는 궁궐에 발포를 했으니 말이다. 교토 가옥 수만 채가 불탔다. 조슈는 과격파 공경 7명을 데리고 번으로 퇴각했다. 궁궐에 총질을 해댄 역적을 막부가 가만 놓아둘 수는 없을 것이다. 조슈를 정벌하러 막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4개국 연합함대가 조슈의 시모노세키를 포격했다. 앞서 양이를 외치는 조슈번에 포격당해 즉각 보복했던 서양 열강들이 더 큰 함대를 만들어 재차 쳐들어온 것이다. 막부와 서양이 동시에 조슈를 공격하는 형국이었다. 여론은 조슈에 동정적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정말로 개탄스러운 것은 조슈를 공격한 서양 선박이 에도에서 수리를 받은 후 다시 조슈에 가서 싸우고 있다는 겁니다. 이건 모두 막부의 간신과 서양 오랑캐들이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분개했다(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 막부와 서양이 내통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으나 막부가 서양의 공격을 즐기는 것은 확실했다.

서양의 연합함대가 공격해오자 양이 열풍에 들뜬 조슈의 사무라이들은 흥분했다. 드디어 일본 사무라이의 무용과 기개를 보여줄 기회가 왔다고. 그러나 정신주의는 며칠 가지 못했다. 서양 함대의 맹폭 앞에 시모노세키의 조슈번 포대는 그저 고철 덩어리임이 드러났다. 압도적 무력 앞에, 그리고 철저한 패배 앞에 조슈 사무라이들은 잽싸게 태세전환을 했다. ‘서양 오랑캐를 이기려면 저들의 우수한 무기와 전법과 군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엉뚱한 길로 가다가 헛길로 새는 일은 인류사에서 부지기수다. 누가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냉정하게 이를 직시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느냐의 싸움이다.

이때 조슈의 태도는 놀라웠다. 불과 어제까지 그렇게도 처절하게 양이를 부르짖었던 자들이 패하자마자 서양과 협정을 맺고 표변했다. 그리고 가열차게 ‘서양화’ 정책을 추진했다. 간단하다, 서양을 이기기 위해 서양화한다는 것이다. 이 전환에 크게 기여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다. 전자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고, 이노우에는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무렵 조선에 특명전권공사로 와서 일본식 개혁정책을 조선 정부에 강요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1863년 막부 몰래 영국에 유학하러 갔다가 서양 함대와 조슈번이 전쟁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이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급거 귀국했다. 안중근을 만나기 46년 전, 젊은 이토가 영국에 유학을 갔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하자.

이로부터 메이지유신이 발발하기까지 3년 반 동안 막부와 조슈번(혹은 사쓰마번) 사이에 ‘근대화의 경쟁’이 전개됐다. 막부는 지금까지 해온 대로 서양과의 조약을 기반으로 그들의 우수한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고 조슈는 막부를 타도하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양을 몰아내기 위해서 서양문물을 필사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핵심은 사무라이답게 군사 분야였고, 그 중심인물이 바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다. ‘군사혁명(military revolution)’이라는 말이 있다. 근대화는 무엇보다도 전쟁을 수행하면서 군대를 비롯한 각 사회 분야가 효율·경쟁·규율을 체화하면서 이뤄졌다는 학설이다. 산업의 고도화, 금융의 발전, 민주화 등도 그 과정에서 실현됐다는 것이다. 근대화 이전 2~3세기 동안 유럽은 지속적인 전쟁상태였고, 주지하다시피 동아시아는 18세기 이후 이렇다 할 전쟁이 없는 장기평화 시대가 이어졌다. 이 학설에 따르면 동아시아는 전쟁이 없는 평화체제였기 때문에 근대화가 늦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조슈로 돌아오자. 웅번(雄藩)이라고 해봤자, 인구 50만명 정도로 평택시 규모다. 이런 번에서 1864년부터 3년여간 파천황적인 개혁정책이 실행됐다. 먼저 사무라이만의 군대 대신 평민을 군대로 동원했다. ‘기병대(奇兵隊)’라고 한다. 이름에서 보듯 정규병이 아닌 기이한 군대다. 사무라이가 아닌 농민, 상인, 수공업자, 신관(神官) 등을 끌어모아 만든 데서 나온 이름이다. 그러나 이 군대를 서양식으로 훈련시켰다. 정규 사무라이 군대는 자존심 때문에 서양식 전법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사무라이는 각자가 전투의 플레이어지만 근대적 군대의 병사는 까놓고 얘기하면 그저 부속품이다. 사무라이는 이를 수용하기 어려워했다. 조슈번의 개혁파는 기병대를 따로 만들어 사무라이의 기득권을 돌파했지만, 이 구도는 그 후로도 계속됐다. 메이지정부 수립 후 사무라이만이 아니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징병령을 시도했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는 이에 반대하는 사무라이에게 암살당했다(1869). 사무라이는 평민들이 무인의 역할을 침범하는 것을 분개하며 1870년대 내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정점이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끈 서남전쟁(西南戰爭)이다(1877). 그러나 2만여명에 달하는 사무라이 군대를 메이지정부의 평민 군대는 간단히 진압해버렸다. 여기에 이르는 출발점이 바로 조슈번의 기병대에 있다고 하면 ‘조슈 중심사관’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시기 조슈번의 절체절명의 개혁이 그 후 역사전개에서 갖는 적지 않은 의미를 부인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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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부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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