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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의 일본사 이야기]쇼군 권력 균열 틈타…사쓰마·조슈, 막부 개혁에 칼을 대다

<사쓰마·조슈의 정치적 대두>

막부 최고 실력자 다이로 암살 이후

300년간 막부 정치 '찬밥신세'였던

도자마 다이묘, 대군 이끌고 교토 입성

일왕의 칙사 포섭해 막부 개혁 촉구

일왕-쇼군 격돌한 1863년의 교토

수백년 만에 日열도 중심으로 부상

지금도 교토 외곽에 남아있는 데라다야(寺田屋). 여기서 사쓰마 가신들끼리 살육전을 벌였다.






막부 최고 실력자인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백주대낮에 낭인들에게 암살당하자 막부의 권위는 일순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무라이 사회는 무력이 힘이요, 명분이요, 정통성이다. 사회는 정교하게 짜인 무력의 우열체계다. 강자는 지배하고 약자는 말없이 순종해야 한다. 강자에게는 굽혀야 하고 약자는 억눌러야 한다. 이게 사회의, 인생의, 세계의 당연한 원리다.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라면 힘센 자에게 항의하고 약한 자 편을 들어야 한다는 가정교육은 바람직하지 않다. 힘 대결에서 지면 무조건 “마이리마시다!(졌습니다)”라고 외치며 무릎 꿇어야 한다. 졌으면서도 “두고 보자”며 승복하지 않는 일은 이 세계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머리를 쳐들 수 있는 날은 저놈보다 힘이 강해졌을 때뿐이다. 힘의 우열로 모든 게 결정되는 ‘쇼부(勝負·승부)’의 세계다.

막부는 여기에 빈틈을 보인 것이다. 이 틈을 사쓰마번(藩), 조슈번, 도사번이 치고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일본열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대규모 영지를 보유한 번들이었다. 이들을 서남 웅번(西南雄藩)이라 부른다. 당시 전국에는 270개 정도의 번이 있었지만, 덩치가 큰 번은 소수였다. 20만석(石) 이상이 20여개, 10만석 이상이 50개 정도였다. 대체로 10만석 이상은 돼야 제대로 된 번 대접을 받았다. 당시 번들은 희한하게도 각자의 생산력, 즉 석고(石高)로 평가됐다. 석고만으로 사회적 위신이 결정되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도쿠가와 시대가 경제적 실력을 중시하는 ‘경제사회’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석고는 기본적으로 군사력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가 하는 지표였다. 따라서 석고를 중시했다는 것은 도쿠가와 시대가 ‘군사사회’였음을 보여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점이 조선사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점 중 하나다.

사쓰마는 72만석, 조슈는 36만석, 도사번은 24만석으로 모두 내로라하는 대번(大藩)들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편을 들어 전쟁 후 도쿠가와에게 처벌을 받았던 도자마 다이묘(外樣大名)들이었다. 이 때문에 도쿠가와 시대 내내 막부 정치에 개입할 수 없었다. 300년 가까이 굳게 닫혔던 문에 드디어 빈틈이 보였다. 그러나 막부는 여전히 버거운 상대다. 그래서 이들은 미토번이나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이용하거나 무엇보다 일왕을 정치무대에 끌어들였다. 막부와 쇼군의 권위를 누를 수 있는 것은 역시 일왕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번들의 가신단 누구나가 막부에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다이묘나 상급 사무라이들은 이미 300년 가까이 막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부귀영화를 누려왔다. 새삼 그런 세상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중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도 곤궁했고, 무엇보다 상인들이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정치적으로도 신분제에 꽁꽁 묶여 대대로 내려오는 서리 일 비슷한 가업 말고는 발언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전공을 세워 어떻게 출세라도 해보련만....이들에게 페리가 등장하고 다이로가 살해당하는 등 세상이 소란해지는 것은 싫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도, 기도 다카요시도, 사카모토 료마도, 이토 히로부미도 그런 무리 중에 있었다.

먼저 사쓰마다. 규슈 남단에 거대한 영지를 갖고 있던 이 번은 이미 쇼군 후계문제로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에 맞선 바 있다. 그런데 그 정쟁 와중에 영명하기로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던 다이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요절했다. 그의 지시로 에도에서 맹렬한 반(反)막부 활동을 하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주군을 잃고 쇼군 후계문제도 실패로 돌아가자 번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에 몸을 던져버렸다. 막부의 추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얼마나 주군을 흠모했는지 알 수 있다. 같이 투신한 동지는 죽었지만, 사이고는 구조됐다.

교토로 진군해 막부개혁을 촉구한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




나리아키라의 후계는 그의 이복동생 시마즈 히사미쓰의 어린 아들로 정해졌다. 자연히 히사미쓰가 대원군처럼 실권을 쥐게 됐다. 이복형만큼은 아니었지만 히사미쓰도 유능한 정치가였다. 1862년, 다이로의 목이 잘린 지 2년 후 그는 약 1,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교토로 행군했다. 교토로 가 일왕과 조정을 자기편으로 삼고 막부에 개혁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막부 지배 하에서 다이묘가 대군을 이끌고, 그것도 일왕이 있는 교토에 입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전국의 사무라이들이 흥분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쓰마 가신들은 더더욱 그랬다. 드디어 주군이 일왕의 선봉이 돼 막부를 친다고 신나했다. 그들 중 수십명이 교토 인근의 데라다야(寺田屋)라는 곳에 숙박하며 거사를 꾸몄다.

그러나 정작 주군의 뜻은 딴 데 있었다. 교토에 들어간 히사미쓰는 애초에 막부를 전복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가진 게 너무 많았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막부의 정치운영에 사쓰마번이 좀 더 간여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데라다야에 모여 있는 ‘철부지’들은 위험천만한 존재들이었다. 즉각 번의 최고 검객들에게 일망타진을 명령했다. 안면이 있는 같은 가신들끼리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를 일본사에서는 ‘데라다야 사건’이라고 한다. 주군에 대한 절대충성이라는 사무라이의 의식에 큰 균열이 발생한 순간이었다. 주군에 대한 충성보다 ‘더 큰 대의’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느 쪽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이 ‘더 큰 대의’가 일왕, 그리고 ‘일본’이라는 국가로 수렴돼가는 과정이 곧 메이지유신이다.

과격파 가신들을 도륙한 히사미쓰는 에도로 갔다. 그는 영리하게도 일왕의 칙사를 모시고 갔다. 그리고 일왕의 명령이라는 형식을 빌려 막부의 개혁을 촉구했다. 쇼군이 교토에 가서 일왕에 배알할 것, 막부 정치에 외부 유력자를 포함시킬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칙사의 힘을 빌리는 형식이었다고는 해도 감히 일개 도자마번이 막부를 상대로 개혁을 촉구한 건,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한번 터진 둑에 밀물이 밀어닥쳤다. 사쓰마에 뒤질세라 이번에는 조슈번이 칙사를 대동하고 들어와 막부 정치 개혁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사쓰마·조슈, 즉 삿쵸(薩長)의 경쟁이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칙사가 쇼군에게 일왕의 칙서를 전달하는 장면이다. 이전까지는 쇼군이 상단에 앉고 칙사가 하단에서 칙서를 바치는 형식이었지만 이때 칙사의 강경한 주장으로 그 자리가 바뀌었다. 이제 시각적으로도 일왕과 쇼군 중 누가 윗사람인지가 명확해졌다.

조슈번은 공식적으로는 36만석이었지만 실제 경제력은 100만석에 가깝다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석고는 대체로 도쿠가와 시대 초기에 산정됐는데 그 후 경제 부침에 따라 공식석고와 실제 경제력 간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조슈는 소금·종이 등 상품작물이 풍부한데다 항구 시모노세키를 끼고 있어 교역수입도 대단했다.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조슈번은 에도 정계에 뛰어들었다. 사쓰마와 마찬가지로 조슈번 내에서도 여러 정치세력이 분출했는데, 그중 압권은 과격한 존양파(尊攘派) 세력이다. 앞서 얘기한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배운 사람들이다. 사쓰마에서는 다이묘와 상층 사무라이들이 중하급 사무라이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기존 서열을 어느 정도 유지했지만, 조슈에서는 중하급 사무라이들이 다이묘를 옹립해 실권을 장악해나갔다. 저 유명한 조슈번의 ‘존양파’다. 투쟁 과정에서 많은 호걸들이 죽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훗날 메이지 정부의 거두가 됐다.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숱하다.

사쓰마와 조슈에 연타를 맞은 막부는 쇼군을 상경시키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몰렸다. 표면적으로는 일왕의 요구였지만, 사실은 사쓰마와 조슈의 공작이었다. 이듬해인 1863년 초 쇼군은 결국 교토에 갔는데, 이것은 1634년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래 229년 만의 일이다. 당시 이에미쓰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교토를 위압했지만, 지금은 일왕에게 그간의 비례(非禮)를 사죄하기 위한, 초라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당시 교토에는 조슈번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열혈 존양파 ‘지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혹시 쇼군이 그들에게 포로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 후로도 쇼군 이에모치는 교토와 오사카에 두 번 더 올라가야 했고,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는 아예 내내 교토에 있어 재임 중 에도 땅을 밟지 못했다. 에도는 이미 정치적으로 공동화 상태로 들어가고 있었고, 교토는 수백 년 만에 다시 일본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얼마 전 점심 중, 여행과 미식에 일가견이 있는 어떤 선생님이 본인이 좋아하는 5대 도시로 교토를 서슴없이 꼽았다. 교토를 가본 사람이라면 다섯 손가락은 몰라도 열 손가락 밖으로 이 도시를 밀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밑 모르게 아름답고 맛있다. 그런데 사케 집을 찾으려고 10분 헤매는 동안에도 도처에 ‘아무개, 아무개 순난지(殉難地)’라는 표지가 자꾸 눈에 띤다. 전투로, 암살로, 처형으로 이때 죽은 사람들의 흔적이다. 이제 일왕과 쇼군이 격돌한 그 뜨거웠던, 그리고 무시무시했던 1863년의 교토로 들어가 보자.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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