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4년 6월2일 영국 의회가 숙영법(宿營法·Quartering Act)을 제정했다. 대상은 북미 식민지. 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민간 가옥을 군의 막사로 징발할 수 있다는 게 골자다. 영국이 숙영법을 식민지에 강제한 것은 1765년에 이어 두 번째. 식민지 주민들은 9년 전 숙영법과 달리 이번에는 반발하고 나섰다.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주둔 자체를 꺼렸다. 9년 전에는 프랑스와 7년 전쟁이 끝난 직후인데다 원주민들이 저항할 조짐을 보여 군대가 절실했지만 평화로운 시기에 굳이 영국 정규군이 상시 주둔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둘째, 본국의 간섭 탓에 식민지가 성장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특히 영국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의 진출을 막으며 불만이 더욱 쌓였다. 계속 유입되는 이민을 중심으로 새로운 땅을 개척하려는 수요가 많아졌지만 영국은 적대적 원주민이 많은 중서부에서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군사비 지출 증가를 야기할 서부 개척을 엄금하는 영국군에 대한 반감이 자연스레 커졌다. 샛째 요인은 감정 대립. 연이은 전쟁으로 재정이 나빠진 영국이 식민지에서도 세금을 거두려고 시도하면서 본국 정부와 식민지 간 악감정이 쌓였다.
결정적으로 1773년 말 터진 보스턴 티 파티 이후 본국의 여론이 나빠졌다. 차 342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이 알려지자 런던에서는 응징론이 들끓었다. 조세부담률이 본국보다 훨씬 낮으면서도 영국인의 의무는 도외시한 채 식민지의 권리만 누리려는 북미 식민지에 대한 일련의 규제법안이 줄이어 나왔다. 본국 정부가 식민지를 상대로 만든 규제법안의 이름(참을 수 없는 법)에도 감정이 실렸다. 식민지가 영국 군대의 병영과 식량까지 제공하도록 강제한 숙영법은 각 주의 거센 저항을 불렀다.
영국 국왕에게 끝까지 충성하자고 주장하던 왕당파마저 ‘영국군이 용병이냐’고 분노를 터트렸다. 영국군이 주로 주둔하던 뉴욕주가 숙영지 제공을 거부하자 본국 정부는 식민지의 행정권을 몰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수익자 부담 원칙을 강조한 영국과 조세저항에 나선 식민지 간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결국 전쟁과 미국 독립으로 이어졌다. 분담금 갈등은 과거형에 머물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을 압박한다는 소리에 미군 예비역 장성들이 ‘미군은 용병이 아니다’라며 걱정한단다. 트럼프의 대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은 미국 독립의 역사에 대한 자기 부정인 동시에 동맹까지 뒤흔드는 바보짓이다. 역사에서 배우자.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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