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계 1류 기업에 비해서는 경쟁력이 턱없이 약하다. 그런데 그들과 정면으로 경쟁해야 하는 시점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여느 2류 기업 경영자의 한탄 같기도, 어떻게 보면 조바심 같이 보이기도 한 이 문구는 사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 지난 1997년 내놓은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 나오는 말이다. 이 회장의 우려대로 23년전 삼성전자(005930)는 TV나 가전 업계에서는 소니에게, 반도체 등에서는 일본의 도시바 등에 밀리는 상황이었다. ‘애니콜’로 잘 알려진 휴대전화 사업 또한 핀란드의 노키아나 미국의 모토로라 대비 이름값이 낮았다.
하지만 2020년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삼성전자의 입지는 말그대로 압도적이다. 올 1·4분기 기준 TV 시장에서는 32.4%, D램 시장에서는 44.1%,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33.3%,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20%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각 시장에서 10년 넘게 압도적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이미지센서 분야 등에서도 1위를 맹추격 중이다.
사법리스크에 무너지는 수십년의 공든 탑 |
이 때문에 이 부회장 구속에 따른 삼성의 경영 공백시 삼성 특유의 선제 투자 및 공격적 인재영입 등에 기반한 ‘초격차’ 전략이 힘을 잃을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코로나19에 따른 글로벌 경제 불확실 성에 더해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각국의 무역장벽 강화라는 파고에 직면한 한국경제에도 악재다. 삼성전자의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 수출에 의지하고 있는 한국 경제가 수년간 뒷걸음질 칠 수 있다는 우려도 끊이지 않는다. 메모리 반도체는 중국이 액정표시장치(LCD)에 이어 또 다시 한국을 뛰어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이는 분야이기도 하다.
6일 산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글로벌 브랜드 순위는 지난 20여년 동안 말 그대로 ‘수직상승’했다. 시장조사기관 인터브랜드에 따르면 지난 2000년 52억달러로 43위에 불과했던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는 지난해 611억달러로 6위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1999년까지만 하더라도 삼성전자는 60위 내에 들지 못하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1위 전자업체’ 정도의 위상에 불과했다. 삼성전자의 약진은 당시 브랜드 순위만 봐도 알 수 있다. 2000년 브랜드 순위에서는 이미 몰락한 노키아(5위), GE(6위), 휴렛팩커드(13위) 등이 상위권을 차지해 IT 업계가 말 그대로 ‘졸면 죽는 시장’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너 경영으로 일군 초일류 삼성 |
삼성전자의 이 같은 급격한 브랜드 가치 상승은 오너 경영의 장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분류된다. 대표적인 분야가 반도체다. 삼성전자는 1983년 3월 이병철 창업주의 ‘도쿄선언’에 따라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해외 언론들은 “삼성의 기술력을 놓고 봤을 때 3년내에 실패할 것”이라는 조롱을 쏟아냈다. 하지만 삼성은 1983년 5월 세계 D램 시장의 주력 제품인 64K D램 개발을 시작해 같은해 12월에 이를 시장에 내놓는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매주 일본을 오가며 기술자들과 D램 개발을 위해 머리를 맞대기도 했으며 이를 통해 일본과의 반도체 기술 격차가 10년에서 4년으로 좁혔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1987년에는 삼성 경영진이 4메가 D램 개발 방식을 ‘스택’으로 할 지 ‘트렌치’를 할 지를 놓고 장고에 들어간 상황에서, 이건희 회장의 결정으로 스택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이 회장은 스택 방식 도입과 관련해 “두 기술을 단순화 해 보니 스택은 고층으로 쌓는 것이고 트렌치는 지하로 파들어가는 식이라 위로 쌓아올리는 것이 문제가 생겨도 쉽게 고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며 “이후 트렌치를 채택한 도시바가 양산시 생산성 저하로 D램 선두자리를 히타치에 빼앗겼고 16메가 D램과 64메가 D램에 스택 방식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는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같은 스택 공법 채택은 삼성이 반도체 시장 진출 10년만에 D램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르게 한 기반을 제공했다.
삼성전자는 1993년 반도체 생산 라인을 8인치 웨이퍼 생산라인으로 전환하며 또 한발 앞서가게 된다. 당시만 하더라도 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가 세계 표준이었지만 당시 이 회장이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판단했다”며 8인치 생산라인 도입을 과감히 밀어 붙인다. 실제 당시 반도체 집적 기술은 1983년부터 1994년 사이에만 4,000배 가량 발전해 단기간의 기술 확보 없이는 기술 개발 주기를 따라가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삼성은 8인치 웨이퍼 생산라인 선제 도입으로 일본 엘피다 등 경쟁 업체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건희 회장은 이외에도 1993년 ‘신경영 선언’과 1995년 불량 휴대전화 ‘화형식’ 등 새로운 어젠다 제시 및 충격 요법으로 글로벌 1위 삼성전자를 만들어 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또한 지난 2014년 이건희 회장이 갑작스레 쓰러진 이후 과감한 판단으로 삼성그룹의 또다른 비상을 이뤄냈다. 이재용 부회장은 2014년부터 1년여동안 한화 및 롯데그룹과 화학·방산 산업 관련 빅딜을 성사시켰다. 기존 핵심 사업이었던 반도체·가전 외에도 전기차배터리·바이오·인공지능(AI) 등을 삼성그룹의 새로운 먹거리로 내세우며 ‘JY(이재용 부회장 이니셜) 특유’의 선택·집중 경영 행보를 잘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약 9조원에 글로벌 1위 전장 기업인 하만을 인수하며 15년 뒤에나 찾아올 자율주행차 시대에 대비하기도 한다. 특히 전장은 삼성전자의 차량용 반도체, 삼성SDI(006400)의 전기차 배터리, 삼성디스플레이의 전장용 디스플레이 등과 크게 시너지가 날 수 있는 분야라는 점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장기적 안목이 돋보이는 선택이란 평가도 나왔다.
넥스트 '비전 2020' 못내놓은 삼성 |
삼성전자는 113조원에 달하는 현금을 보유중이지만 이 같은 사법 리스크에 3년전 하만 인수 이후 ‘빅딜’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임기가 제한된 전문경영인의 판단만으로는 십수년을 내다보는 수조원 가량의 ‘빅딜’에 나서기에 무리가 따르는 탓이다.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하고, 1만5,000여명의 신규 인력 채용에 나서겠다고 지난해 밝힌 것 또한 이재용 부회장의 결단 때문이었다. 삼성디스플레이가 최근 LCD 사업을 정리하고 마이크로LED나 QD디스플레이에 집중하기로 한 것 또한 이 부회장 특유의 선택·집중 경영 철학이 반영된 판단이었다.
삼성전의 ‘미래 비전’ 공백도 여전하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9년 “2020년까지 연간 매출액 4,000억달러, 브랜드 가치 세계 5위 이내를 달성하겠다”는 이른바 ‘비전 2020’을 제시했지만 올해의 절반 가량이 지난 지금까지 신규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2030년 시스템 반도체 부문 1위에 오르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의 경우 삼성전자 DS 사업부에 국한되는 비전이라는 점에서 삼성전자 전체를 아우르는 비전 제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삼성 내외부에서 꾸준히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전문 경영인의 경우 ‘대리인 문제’ 발생 외에도 임기 연임을 위한 단기 실적에 집착할 수밖에 없지만 오너 경영은 발빠른 의사결정 및 주인의식에 기반한 강한 리더십이란 장점이 있다”며 “오너 경영 또한 독단경영 및 사익추구 행위 등의 문제가 있지만 삼성은 실적으로 주주들을 만족시키는데다 이 부회장이 최근 경영권 승계 포기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사익추구 행위 등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오너가 없는 은행 산업이 ‘우간다 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듣는 것과 일부 공기업들의 부실 운영 등을 전문경영인 제도의 문제가 드러난 실제 사례로 꼽는다. 오너 경영의 경우 임직원 대상의 갑질 및 자회사를 통한 사적 이익 수취가 가장 큰 문제로 분류되지만 삼성의 경우 준법감시위원회 설치 등으로 관련 문제 발생 소지를 원천 차단해 놓은 상황이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