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를 시도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다, 시도한다 하더라도 실제 인수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최근 영국 팹리스(반도체설계전문) 업체인 ARM이 시장에 매물로 나올 것이란 외신 보도와 함께 삼성전자(005930)가 인수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반면 업계 전문가들은 해당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다는 데 입을 모은다. 왜 그럴까.
ARM의 지분 100%를 보유한 소프트뱅크는 앞서 수십조원을 투자한 위워크 등 ‘공유경제’ 모델의 시장 가치가 급하락하며 지난해 11조원이 넘는 손실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지난 2016년 약 40조원을 들여 인수한 ARM 지분을 매각하거나 주식시장 상장을 통해 자금 확보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이와 함께 애플과 삼성전자가 ARM 지분 확보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갑작스레 나온다.
다만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ARM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고 본다. 그 이유로는 △개방성에 근거한 ARM의 수익모델 △소프트뱅크가 부풀려 놓은 ARM의 몸값 △각 국의 기업결합심사 장벽 등을 꼽는다. 실제 ARM은 ‘팹리스의 팹리스’로 불리는 독특한 수익 모델 때문에 특정 팹리스가 인수에 나설 경우 모바일 반도체 생태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2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ARM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제작 업체를 대상으로 지적재산권(IP)을 팔아 수익을 내고 있다. 애플, 퀄컴, 삼성전자 등은 ARM의 ‘명령어집합체(Instruction Set Architecture·ISA)’를 기반으로 AP에 탑재되는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개발한다. 물론 로열티는 따로 지불한다. ARM이 ‘팹리스의 팹리스’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 같은 수익 모델은 소규모 인력으로 운영 가능해 영업이익률이 높은 반면 매출 규모가 작다. 실제 ARM 실적이 마지막으로 대외에 공개된 지난 2017년 자료를 보면 매출은 1,524억엔(약 1조7,413억원), 영업이익은 243억엔(약 2,776억원) 수준에 불과하다. 이 같은 영업이익 규모가 지속된다 가정할 경우 소프트뱅크 입장에서는 150여년이 지나야 투자금액(40조원) 회수가 가능한 셈이다.
ARM의 미래 성장성도 불투명 하다. 손정의 회장이 지난 2016년 ARM 인수 당시 “바둑으로 치면 50수 앞을 내다보고 인생 최대의 베팅을 했다”는 발언과 함께 사물인터넷(IoT) 및 인공지능(AI) 시장의 급성장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지만 이들 산업의 성장 그래프는 손 회장의 예측 대비 완만하다. 5세대(G) 이동통신망 구축 작업이 미국의 화웨이 제재와 코로나19에 따른 글로벌 셧다운으로 지지부진한 탓이다.
AI 또한 수년전 머신러닝 기법이 널리 보급되며 ‘퀀텀점프’라 불릴만한 기술 도약을 이뤄냈지만 이후 기술 진보가 지지부진하다. 머신러닝을 위한 빅데이터 확보 문제 외에 머신러닝의 근간이 된 인공신경망 기법에서 추가적인 퀀텀점프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탓이다.
물론 모바일 시장에서만큼은 ARM의 입지가 공고하다. ARM은 스마트폰 시대 도래이후 모바일 기기에 최적화된 저전력 코어를 바탕으로 전통의 CPU 강자 인텔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애플 또한 최근 인텔이 아닌 ARM 코어 기반의 CPU가 탑재된 맥북 시리즈를 내놓을 것이라며 ARM에 힘을 실어 줬다.
다만 앞서 지적했듯이 ARM은 삼성전자나 화웨이, 애플 등과 달리 자체 AP를 내놓지 않고 일종의 기초 설계도라 할 수 있는 ISA를 판매해 수익을 내 매출 규모가 작다. ARM이 주력하고 있는 스마트폰용 반도체 시장 또한 관련 시장 정체로 추가적인 매출 확대가 힘들다. 지금과 같은 팹리스 생태계 확장 속도만으로는 가파른 수익 상승이 불가능한 셈이다.
ARM이 글로벌 최대 반도체 수요처인 중국 시장에서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ARM은 지난 2018년 중국 법인을 설립하며 관련 지분의 51%를 중국 정부가 주도하는 투자사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소프트뱅크가 ARM 지분 인수에 거액을 베팅한 만큼 당시 이자비용 충당 등을 위한 움직임이란 분석이 제기됐다. ARM이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이라는 중국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익 절반을 중국 정부가 가져가는 셈이다.
무엇보다 중국 팹리스 업체들은 ARM의 IP를 기반으로 반도체를 설계 중이지만 ARM 측에 특허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RM의 매출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은 중국의 팹리스들이 ARM에 로열티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손 회장이 2023년 ARM의 재상장을 함께 추진 중이지만 본인이 4년전 지불한 40조원 이상의 몸값을 받을 수 있을 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ARM 지분이 시장에 나온다 하더라도 손정의 회장 입장에서는 ARM의 몸값으로 최소 50조원 이상은 받아야 체면치레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제 거래가 성사되기 힘들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과 같은 수익 모델로는 50조원이 넘는 돈을 주고 ARM 지분 100%를 매입할 경우 자금 회수가 거의 불가능하다. ARM 지분 인수 후 IP 가격을 높이거나 특정 업체에 IP 공급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할 경우, 각 업체가 자체기술 기반 AP제작에 ‘올인’할 가능성이 커 ARM의 수익 모델 자체가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ARM 지분 인수에 나서지 않을 가장 큰 이유로 독과점 관련 우려를 내놓는다. 퀄컴은 자동차용 반도체 업체인 네덜란드의 NXP를 48조원 규모에 인수하려 했지만 지난 2018년 중국 당국이 이를 불허하며 결국 인수에 실패했다. 특정 기업 인수 추진 시 독과점 가능성이 있을 경우 이에 영향을 받게되는 유럽, 중국, 미국, 일본 등 주요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한다. ARM은 모바일 AP의 기초 설계도를 제공하는 만큼 반도체 제작 생태계가 조성된 한국,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주요국가의 관련 당국(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 급)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17년도시바의 메모리 사업부(현 키옥시아) 매각 당시 한국과 미국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분 매입에 나선 사례에 비쳐 ARM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매각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다만 미국의 규제로 중국 업체의 컨소시엄 참여가 사실상 불가능한데다 ARM 몸값 거품론이 여전해 실행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편 IT 업계에서는 손정의 회장의 ‘추락’이 이번 ARM 매각설로 더욱 가속화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손 회장은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미국 이동통신사 티모바일 지분(약 25조원 규모) 매각 작업에 나서는 등 공유경제(위워크, 우버 등)·5G(티모바일 등)·사물인터넷(ARM 등) 과 같은 핵심 사업이 줄줄이 좌초하고 있다.
특히 손 회장이 추진한 이들 핵심 사업의 핵심축인 자율주행차 부문의 성장이 더딘 것이 뼈아프다. 자율주행차는 스마트폰의 몇십배에 달하는 반도체가 탑재될 전망이며 손 회장 또한 이를 노리고 ARM과 우버 등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다만 자율주행기술은 최근 구글 자회사 웨이모가 고전하고 있듯 기술적 도약이 안되고 쉽지 않은 대표 분야로 손꼽힌다.
현재 자율주행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 업체가 손 회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테슬라라는 점도 소프트뱅크 입장에서는 뼈아프다. 지난 2017년 테슬라의 막대한 영업손실에 고전하던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를 비상장 회사로 전환하기 위해 손 회장 측과 접촉했지만, 당시 의결권 등에 대한 이견으로 결국 성사 되지 않았다는 보도가 앞서 나온 바 있다.
손 회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던 테슬라는 3년 뒤 글로벌 자동차 업체 중 시가 총액 1위에 등극할 정도로 압도적 위상을 자랑한다. 특히 테슬라는 ‘레벨2’ 기술 고도화로 승부를 보고 있어 완전 자율주행 시대 도래 가능성을 낮게 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테슬라가 자율주행용 칩 생산에 나서는 한편 위성기반 인터넷 보급 프로젝트 ‘스타링크’를 기반으로 통신망 사업에까지 손을 뻗쳤다는 점도 손정의 회장 입장에서는 뼈아프다. 테슬라는 기존 자율주행시스템에는 모빌아이나 엔비디아의 제품을 썼지만 ‘HW3’부터는 삼성전자와 손잡고 자체 생산한 반도체를 탑재중이다. 스타링크는 전세계에 1GB 용량의 데이터를 8초만에 내려받을 수 있는 1Gbps 속도의 통신망 구축을 목표로 한다. 손정의 회장이 공략 하려던 미래차 및 미래 통신 시장 또한 신흥 강자의 등장으로 수익을 내기 힘들어진 셈이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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