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1년 7월27일 탈라스 강가(오늘날 카자흐스탄 영토). 3만여 당나라 군대와 8만여 이슬람 압바스 왕조-티베트 연합군이 맞붙었다. 당군은 병력 열세에도 자신감에 차 있었다. 수차례 서역 원정에서 빛나는 전공을 쌓은 고선지 장군이 지휘했으니까. 결과는 기대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당군의 일방적 패배. 닷새간 이어진 전투의 초반 양상은 대등했으나 당군은 내부에서 무너졌다. 당의 동맹군으로 참전했던 카를룩이 압바스 측에 붙으며 당군은 전멸하고 고선지와 수천명만 가까스로 도망쳤다.
탈라스 전투에 대한 중국의 기록은 간단한 사실이 적시된 정도다. 중국 기준으로는 동원된 병력이 많지 않는데다 진 싸움이어서 그럴 수 있다지만 승자인 이슬람의 기록도 많지 않다. 탈라스 전투의 승장인 아부 무슬림이 견제를 받다가 755년 암살당한 뒤 기록도 함께 지워진 것으로 보인다. 양쪽에서 기억하기 싫거나 지우고 싶은 전투였지만 탈라스 전투는 지구촌의 역사에 크나큰 흔적을 남겼다. 중원을 차지했던 당과 막 발흥하던 압바스 왕조라는 두 제국의 충돌로 중국의 서진이 막혔다.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이슬람과 유교 세계의 경계선도 이 전투의 결과물이다.
불교와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를 신봉하던 중앙아시아 지역은 모두 이슬람으로 바뀌었다. 이 지역 나라들의 국명이 ‘스탄’으로 끝나는 것도 길게 올라가면 이 전투의 소산이다. 무엇보다 큰 영향은 제지술 전파. 당나라군 포로를 통해 제지 기술이 서역에 알려졌다. 사마르칸트에 제지공장 300개가 들어서고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카이로에도 제지술이 퍼졌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에도 1129년 유럽 최초의 제지공장이 설립됐다. 곧 독일과 이탈리아·프랑스 등 유럽 전역으로 퍼진 제지술은 과학과 신학·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문예 부흥(르네상스)도 제지술의 확산과 맥을 같이 한다.
일찍이 파미르고원과 천산산맥을 넘어 서역을 개척하며 용명을 떨쳤던 고선지 장군은 왜 패했을까. 오만과 과욕 탓이다. ‘항복하면 후대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성문을 열어준 석국의 국왕을 장안으로 압송해 처형하고 보물을 약탈해 서역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당과 이슬람 사이에서 눈치 보던 서역 일대가 대거 이슬람에 의탁한 것도 관용을 잃어버린 당 제국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고구려 왕족 출신 장군 고사계의
아들로 절도사까지 올랐던 고선지도 모함을 받아 승장과 같은 해(755년)에 죽었다. 서역에 전파된 기술이 실은 당이 아니라 고구려 제지술이라는 주장도 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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