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출판사 ‘왓어북’을 운영하는 안유정씨는 지난 6월부터 강릉에서 살고 있다. 애초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지인이 강원도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같이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했고, 강릉뿐만 아니라 춘천·고성·태백·속초 등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모두 강원도가 자랑하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각각의 매력이 뚜렷한 지역이다. 그중에서 강릉을 선택한 것은 자연환경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을 하기에도 좋은 환경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달 말 강릉에서 만난 안씨는 명주동에 위치한 ‘파도살롱’이라는 공유 오피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릉 한 달 살기는 만족스러웠다. 빡빡한 서울을 벗어나 훨씬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고, 일하기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일하고 싶을 때는 일하고, 놀고 싶을 때는 놀면서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생활에 크게 만족했다. 그러다 보니 안씨의 강릉 살기는 더 길어졌다. 그는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 보니 반강제적으로 고립돼 있는데, 무엇이든 해야 하는 서울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다”며 “한 달을 지내다 보니 괜찮아서 큰 고민 없이 한 달 더 살아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최근 강릉이라는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10여년 전인 지난 2009년 강릉시가 강원발전연구원에 의뢰해 마련한 여행실태조사에 따르면 강릉 여행객의 77.6%는 2일 이하로 강릉에 머물렀다. 강릉이라는 도시는 동해바다·경포대 등으로 대표되는 관광지라는 이미지가 강하고, 사람들에게 한국의 여느 중소 지방도시와 마찬가지로 보고 즐길 거리가 많지 않다는 인식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조사에서 강릉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한 질문에 경포대(19.7%), 동해바다(13.9%), 오죽헌(11.3%)이라는 답변이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을 하기 위해, 또는 살기 위해 강릉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5월부터 파도살롱을 운영하고 있는 김지우 더웨이브컴퍼니 대표는 “강릉은 시장이 너무 작아 처음부터 리모트워크에 큰 비중을 두고 시작하지는 않았는데, 코로나19 이후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며 “외지인의 비중이 늘었고, 예전에는 한 달 동안 장기체류하는 사람들이 아예 없었는데 최근에는 다양한 이유로 강릉에서 오래 머무르는 이들이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더웨이브컴퍼니에서 근무하는 직원 9명 중 6명도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강릉으로 이주한 이들이다. 잠시 머물다 가는 관광지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강릉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최근 강릉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강원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문화시설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2018년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강릉까지 KTX가 개통되면서 서울 접근성이 크게 개선됐다. KTX를 타면 청량리역에서 강릉역까지는 1시간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웬만한 수도권 신도시에 서울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시간보다 적게 소요된다. 최근 강원도로 이주한 김경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복잡한 서울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KTX가 생기고 출퇴근이 가능하게 되면서 강릉으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강릉은 강원도의 중심 도시이다 보니 문화적 기반들도 잘 갖춰져 있어 딱히 불편한 점이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 강릉은 영동권에서는 보기 드물게 역사적인 전통을 지닌 도시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인 오죽헌이 있고, 허균과 허난설헌 등 뛰어난 문인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됐다는 말이다.
강릉이 가진 매력적인 콘텐츠들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대표적인 것이 커피다. 강릉은 2000년대 초반부터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커피 1세대로 불리는 박이추 보헤미안커피 대표, 김용덕 테라로사 대표가 강릉에 자리를 잡았다. 2002년 강릉 학산에서 1호점을 낸 테라로사는 현재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강릉을 넘어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브랜드가 됐다. 또 한적했던 안목해변은 스타벅스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커피 거리가 됐으며, 횟집과 모텔밖에 없었던 경포해변까지 커피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다. 2009년부터는 매년 커피 축제도 열리고 있다. 한국은행 강원본부가 발간한 지역경제 보고서에 따르면 올 4월 말 기준 영동 지역 커피 전문점은 총 1,166개로, 이 중 45%가 강릉에 몰려 있다. 우리나라의 인구 1만명당 커피 전문점 수는 14개인데 강릉은 이보다 훨씬 많은 25개다.
여기에 최근 강릉의 자원을 활용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움직임까지 나타나면서 강릉은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강릉을 대표하는 수제 맥주 브랜드인 ‘버드나무브루어리’도 그중 하나다. 버드나무브루어리는 1970년대에 지어진 탁주 공장을 개조해 2015년 수제 맥주 양조장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막걸리를 찾지 않으면서 수명이 다한 오랜 양조장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수제 맥주를 만드는 양조장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특히 버드나무브루어리는 쌀·국화·석창포·솔잎 등을 활용해 강릉의 색깔을 내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강릉 사천면 미노리에서 나는 쌀을 이용한 ‘미노리 세션’이 대표적이다. 또 강릉의 최대 축제인 단오제 시즌에 맞춰 관련 상품도 출시하는 등 강릉이라는 지역의 특색을 브랜드에 잘 녹여내고 있다.
강릉역 인근에 자리 잡은 ‘위크엔더스’라는 호스텔은 강릉의 자연을 재해석해 숨겨진 매력을 끌어낸 곳이다. 위크엔더스를 운영하는 염승식·한귀리 공동대표는 원래 서울에서 음악을 하고, 방송국 PD로 일하던 이들이다. 그들이 강릉에 자리를 잡은 것은 우연히 서핑을 접하면서다. 약 5년 전부터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서핑을 즐겼고, 지난해부터는 아예 강릉에 정착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강릉의 자연을 ‘재해석하고, 재소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위크엔더스는 강릉이 지닌 자연을 활용해 ‘리트릿 오롯이, 나’라는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리트릿(retreat)은 바쁜 일상에서 한 발 벗어나 내면을 수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을 맡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바로 리트릿을 주제로 한 영화다. 최근 한국에서도 20~3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리트릿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도네시아 발리나 태국 치앙마이 등으로 요가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위크엔더스는 강릉의 자연을 활용해 요가·서핑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염 공동대표는 “강릉은 경포대와 경포해변 등 전통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들이 많지만 지금까지는 그저 보는 데 머물렀다”며 “하지만 최근 웰니스(wellness)를 추구하는 젊은 층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원하는 능동적으로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연은 그대로지만 이를 재해석해 완전히 새로운 강릉으로 리브랜딩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크엔더스는 강릉을 대표하는 음식인 순두부를 활용해 두부 스프레드라는 메뉴를 개발하기도 했다. 염 공동대표는 “앞으로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강릉을 기반으로 하는 커뮤니티를 더 탄탄하게 키워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강릉 토박이인 김지우 더웨이브컴퍼니 대표는 “강릉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다와 소나무인데 사실 강릉은 오죽헌과 선교장 등 역사적인 콘텐츠도 많고, 최근 위크엔더스와 같이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강릉이 가진 자연을 재해석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또 강릉이 가진 콘텐츠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진화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순두부가 대표적이다. 1.0 버전인 하얀 순두부에서 2.0 버전 순두부 전골, 3.0 버전 짬뽕 순두부, 4.0 버전 순두부 젤라토로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김 대표는 “바다를 보기 위해 들르는 관광지 정도로 여겨졌던 강릉이 지금은 굉장히 다양한 것들을 취사선택해 즐길 수 있는 지역이 됐다”고 말했다.
강릉시에 따르면 2018년 강릉을 방문한 관광객은 1,669만명으로, 전년 대비 약 14% 증가하는 등 2015년 이후 매해 꾸준히 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해외로 나가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더 많이, 더 자주 강릉을 찾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단순히 먹고 즐기기 위해 강릉을 찾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강릉에서 일을 하고 다른 삶을 추구하는 이들도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강릉이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도시로 진화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김 교수는 “청년들을 위한 지원은 많은데 시간도 많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50대 이후 사람들의 장기체류를 돕기 위한 지원 프로그램은 부족하다”며 “강릉시 차원에서 빈집을 활용해 장기체류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개발하고 시니어 세대들을 위한 솔숲걷기·요가·서핑·글쓰기 등 실버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릉=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