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미술행정가이자 평론가인 앨런 바우니스는 ‘예술가는 어떻게 성공하는가(The Conditions of Success:How the Modern Artist Rises to Fame?)’라는 책을 썼다. 지난 1960년대부터 영국과 미국 현대미술의 발흥을 직접 목격한 저자가 제목 그대로 예술가가 성공하는 일종의 법칙을 추출해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성공의 단계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예술가는 네 단계를 거쳐 성공에 이른다.
첫째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 단계, 둘째 평론가의 인정을 받는 단계, 셋째 컬렉터의 인정을 받는 단계, 넷째 대중의 인정을 받는 단계.
사실 저자의 논지는 엉성하고 허술하지만 ‘4단계 이론’ 자체는 숙고할 가치가 있다. 우선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 단계에 대해 저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예를 들었다. 반 고흐는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사후에는 명성을 얻었는데 이처럼 다소 늦게라도 명성을 얻을 것을 예견하게 하는 요소가 그의 삶 국면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주변의 동료들이었다. 반 고흐 내면의 잠재력을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폴 고갱, 에밀 베르나르, 폴 시냐크, 조르주 쇠라 같은 화가들이 사람을 귀찮게 하는 반 고흐를 상대해줬겠느냐는 것이었다.
세상은 알아주지 않지만 같은 예술가 동료들에게서는 이해를 받았던 비운의 천재! 매력적인 설명이다. 그런데 찬찬히 따져보면 맞는 게 별로 없다.
일단 반 고흐는 냉정히 말하자면 동료들에게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반 고흐와 친했고 나중에 누군가가 반 고흐에 대한 험담을 하자 싸우려 들 정도로 그를 옹호했지만, 그의 작품을 정말로 훌륭하다고 여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갱도 반 고흐와 가까웠던 인물로 알려졌다. 1888년 가을 남부 프랑스의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살았으니 언급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반 고흐는 고갱을 예술가로서 존경했지만 고갱은 반 고흐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고갱은 반 고흐를 그저 덜떨어지고 정신이 좀 이상한 예술가로 봤다. 그런데도 반 고흐와 함께 지냈던 건,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화상으로서 고갱을 도왔기 때문에 인사치레라도 해야 했던 것이다.
예술가 집단 내에서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는 과정에는 종종 미움과 질투가 동반된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상주의 그룹을 주도했던 에드가르 드가나 에두아르 마네 같은 예술가가 그렇다.
드가는 성질이 고약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추종자가 적지 않았다. 로트레크는 드가가 자신의 개인전에 와서 작품들을 보고 어떻게 평가할지 전전긍긍하며 기다렸다. 마침내 전시장에 나타난 드가가 한 바퀴 둘러보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로트레크는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인상주의 그룹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는 드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뜨뜻미지근해하자 초조해했고, 미국인 여성 화가 메리 커샛은 드가를 만난 뒤로 거의 평생토록 예술에 관해서는 드가의 안목과 판단에 의지했다.
마네 역시 당시 프랑스의 주류 미술계에서는 망나니 취급을 받았지만 뒷날 인상주의 그룹을 이루게 될 젊은 예술가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예술가로서 동료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저 성격이 좋고 모두의 마음에 흡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누군가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고, 본인의 성격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재능이 질투를 유발할 수도 있다. 이런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존경을 받는다는 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바우니스가 말한 두 번째 단계인 평론가의 인정을 받는 단계도 얼른 보면 그럴듯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어긋난다. 한창 마네가 ‘핍박’을 받던 시절 소설가 에밀 졸라는 평론가로서 마네를 옹호했다. 하지만 졸라의 평이 마네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뒤집지는 못했다. 심지어 졸라 스스로도 소설 ‘작품’에서 마네와 폴 세잔을 섞어서 실패한 화가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인상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사조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모네의 그림을 보고 조롱하는 의미로 “나는 그 그림에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벽지만도 못한 그림이다”라고 썼던 글에서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유래한 것은 유명하다. 그 뒤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또한 평론가들이 폄하하는 의미로 쓴 말이 사조의 명칭이 됐다.
바우니스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자면 이렇다. 성공할 예술가는 주변의 눈 밝은 이들에게 일찍부터 인정받는다. 여러 사람에게 널리 인정받는 것은 나중 일이고, 우선은 몇몇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 게 중요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