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 최대 반도체 제조업체 SMIC에 대한 수출규제에 나선 것은 자국 반도체 산업이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반도체 경쟁력이 더 커져 자국 산업의 맞상대로 도약하기 전에 싹을 잘라내겠다는 뜻이다. 미 정가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자국 경제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한층 더 힘이 실리고 있다.
27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미 연방의회는 반도체의 국내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총 250억달러(약 29조원) 규모의 신규 보조금 투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인텔 등 미국 반도체 기업들에 거액을 지원하는 내용 등을 담은 초당파 상하 양원 일원화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닛케이는 “반도체 공장과 연구시설 등에 연방정부가 1건당 최대 30억달러의 보조금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면서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에 뒤진 차세대 반도체의 미세화 기술을 따라잡기 위한 연구개발에 50억달러의 예산이 추가 배정된다”고 법안 내용을 설명했다.
미국이 반도체 지원 보조금 지급을 추진하는 것은 중국의 반도체굴기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짙다. 중국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등이 앞다퉈 최근 수년간 반도체 산업 육성 프로젝트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중국 전역에서 50개 이상의 대규모 반도체 투자 프로젝트가 추진됐으며 총투자비는 2,430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중국은 오는 2025년 세계 반도체의 70%를 국내에서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
이 때문에 미국이 당장은 반도체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의 추격에 대한 위기감에 사로잡힌 상황이다. 닛케이가 인용한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 분석에 따르면 글로벌 반도체 판매시장은 인텔을 주축으로 한 미국 기업의 점유율이 47%를 차지하며 이어 한국(19%), 일본·유럽(각 10%), 대만(6%), 중국(5%) 순이다. 하지만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이 집계한 생산능력 기준으로 보면 미국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12%에 그친 반면 중국은 15%를 기록했다. 중국은 2030년까지 세계 생산시장 점유율을 24%로 높여 대만을 제치고 선두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닛케이는 “미국에는 엔비디아·퀄컴 등 반도체 회로 설계에 특화된 팹리스 기업들이 다수라 대만 등 해외 기업에 생산을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는 미 의회와 행정부가 자국 반도체 업계에 거액의 보조금을 지원해 공급망(서플라이체인)의 중심을 미국으로 되돌려놓으려 한다”고 전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겠다는 미국의 자국 지원 조치 움직임으로 한국 반도체 업체들에는 부정적 영향이 예상된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은 크게 미국의 팹리스 업체가 제품을 설계해 대만과 한국의 파운드리 기업이 이를 만드는 구조다. 미국의 퀄컴·엔비디아·AMD 등이 반도체를 설계해 주문하면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 등이 반도체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방식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반도체 설계 및 장비 시장을 장악한 미국이 약점으로 지적돼온 생산 부문의 경쟁력 향상에 나선 것은 반도체 생산공정에 독보적 기술력을 지닌 한국 업체들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생산시설을 확충해 보조금을 받는 방법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TSMC의 경우 미국의 중국 화웨이 제재가 본격화된 5월 12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미국은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 확장에도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미국의 중국 SMIC 규제는 한국 반도체 기업에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14나노 공정이 주력인 SMIC는 내년 7나노 공정 도입계획을 밝힌 상태지만 미국의 제재가 본격화하면 7나노 진입은 힘들어진다. 전 세계에서 7나노 이하 제품 생산이 가능한 2개 업체인 삼성전자와 TSMC로서는 잠재적인 경쟁자가 사라지는 셈이다. SMIC와 시장이 겹치는 SK하이닉스와 DB하이텍도 SMIC 제재에 따른 반사이익이 기대된다. /김기혁·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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