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9월 28일, 프랑스 전역에서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내용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헌법 개정. 투표는 평온하게 진행됐다. 군부의 입김이 강한 알제리 등 일부 지역에서 강압적인 찬성 유도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특이할 소요는 거의 없었다. 투표 결과는 예상대로 찬성이었으나 프랑스 국민들은 보기 드물게 몰표를 던졌다. 참여도 높았다. 투표율 80.63%에 찬성률 82.60%. 급진좌파의 본산으로 여겨지던 파리의 찬성률도 70%가 넘었다.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 권리로 여기고 의회의 권한을 중시하던 프랑스는 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에 찬성했을까.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정치에 대한 불만이 컸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이래 헌법으로 공화국, 제정, 입헌군주정, 왕정, 임시정부 등 정치구조가 바뀐 것만 14차례. 특히 제3공화국(1870~1940)과 제4공화국(1946~1958)의 경우, 행정부가 걸핏하면 의회의 불신임을 받아 중도 하차해 ‘왈츠 정부’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두 번째, 프랑스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고 여긴 국민이 많았다. 1954년 디엔비엔푸 함락으로 100년 인도차이나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데 이어 1958년에는 알제리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알제리 무장세력과 대화하려던 프랑스 정부에 반발해 50만 알제리 주둔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 주둔군까지 가담하고 나섰다. 내전으로 번지기 직전 반군이 사태 해결의 적임자로 샤를 드 골 전 수상을 선택하고 드골은 반군의 복종과 신헌법 제정을 조건으로 전권 총리직을 받아들였다.
국민투표로 제5공화국이 출범하며 7년 임기를 보장받고 비상 대권과 의회해산권을 갖게 된 드골은 ‘위대한 프랑스’라는 이름 아래 중공 정권 승인, 북대서양조약기구 탈퇴, 독자적 핵무장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 5공 헌법은 7080세대에게 낯설지 않다. ‘유신헌법에 영향을 준 헌법’으로 단골 시험문제였다. 박정희 정권은 프랑스처럼 강해지려면 우리도 대통령에게 권한을 몰아줘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정말 프랑스와 한국은 비슷했을까. 그렇지 않다. 헌법을 초월하는 긴급조치를 1년 반 동안 9차례나 발동한 박 대통령과 달리 드골은 11년 동안 비상대권을 알제리 사태 해결을 위해 한 번 만 썼을 뿐이다. 25차례 개정을 거쳤지만 62년을 내려온 프랑스 5공 헌법의 비상대권이 발동된 적도 세 번뿐이다. 프랑스와 한국, 드골과 박정희는 달랐다. 한쪽은 절제했고 다른 쪽은 남용했으니.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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