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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베르사유 10월 행진

프랑스혁명 되살린 부녀자들의 시위

부슬비를 맞으며 베르사유궁으로 행진하는 여성 시위대. 이들의 10월 행진은 지지부진하던 혁명에 기름을 붓는 효과를 가져왔다./그림=위키피디아




1789년 10월5일 아침7시, 프랑스 파리 시청 앞 광장. 쇠갈퀴와 낡은 창을 든 부녀자 1만여명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시장, 나오라’ ‘빵을 달라’. 시간이 흐를수록 여성 시위대는 늘어났다. 저울을 속인 빵 장사를 붙잡아 즉석 교수형틀에 매달려는 남성들도 광장에 나왔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7.14)으로 혁명이 시작된 지 두 달 보름여. 평소보다 경비를 두 배로 늘린 국민위병대의 감시에도 두 가지 불만이 군중을 모았다.

첫째는 물가고. 식량 등 생필품 품귀와 급등 배후에 귀족들의 매점매석이나 궁정의 음모가 있다는 의심을 품었다. 둘째, 지지부진하던 혁명에 대한 불만이 컸다. 국왕 루이 16세는 국민회의가 8월에 결의한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의원들은 새로 제정할 헌법에 대한 국왕의 무한적 거부권을 둘러싸고 설전을 펼쳤다. 결국 입헌군주파 의원들이 대세를 차지한 가운데 국왕의 한시적 거부권만은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공화파의 반발은 군권(국민위병대)을 장악한 라파예트 사령관의 의지로 바로 꺾였다. 라파예트는 청원서를 집단제출하려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국왕과 의회에 대한 건의문 제출까지 막았다. 입에서 입으로 ‘귀족들의 힘이 다시 커져 혁명도 사실상 끝날 판’이라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국왕이 불러들인 군대 일부가 혁명의 상징인 삼색휘장을 훼손하고 조롱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세에 분노하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남성들을 대신해 광장에 나온 부녀자들은 발길을 국왕과 국민회의가 있는 베르사유로 돌렸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17㎞를 걸어 베르사유에 도착할 무렵, 군중은 3만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튿날 아침 근위대와 말다툼 끝에 베르사유궁을 습격한 군중들은 모든 것을 다 얻어냈다. 루이 16세는 빵과 음식의 즉각 보급과 봉건제 철폐법안과 인권선언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변화는 국왕의 신변이 확보됐다는 점. 시위 군중을 따라 파리로 돌아온 국왕 부부는 뒤틀리궁에 머물며 시민들의 눈치를 살폈다. 아녀자들의 시위로 혁명은 다시금 추진력을 얻었다.

파리에 머물던 국왕 부부가 해외망명을 시도하다 잡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후 프랑스혁명은 과격한 방식으로 진행됐으나 인류 전체에 유산을 남겼다. 공화정과 왕정,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막론하고 19세기 이후 모든 정치세력은 겉으로나마 프랑스 혁명의 정신인 ‘자유와 평등, 박애’와 ‘천부 인권’를 내세운다. 생존권을 주장하는 부녀자들의 외침과 10월 행진이 현대를 개척한 셈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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