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서 공 안 잃어버리려고 빨간 사인펜을 막 칠하던 기억이 뚜렷해요.”(최나연)
“저는 그때 신인이어서 미국·일본 투어 뛰는 언니들이랑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죠.”(유소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통산 상금 1,000만달러 클럽의 회원인 최나연(33)과 유소연(30)이 핀크스 골프클럽에서 만나 추억에 잠겼다. 둘은 지난 2008년 핀크스컵 한일프로골프대항전의 국가대표팀 멤버였다. 12월에 열렸던 당시 대회는 폭설로 공식 경기가 취소돼 9홀 매치플레이 이벤트만 진행됐고 18세 막내 유소연의 승리 등으로 한국이 크게 이겼다.
둘의 핀크스GC 방문은 무려 12년 만이다. 오는 29일부터 나흘간 열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SK네트웍스·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총상금 8억원) 출전을 위해서다. 대회를 앞두고 코스를 돌아본 둘은 “아예 새로운 골프장이 된 것 같다” “코스 상태가 정말 좋고 전략적인 재미도 크다”고 입을 모았다. 핀크스GC는 2010년 SK그룹이 인수한 뒤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세계 100대 코스’로 거듭났다.
최나연·유소연은 LPGA 한국 선수 3세대쯤 된다. 최나연은 LPGA 투어 통산 9승과 상금·평균타수 1위 동시 수상 등의 기록이 있고 유소연은 세계랭킹 1위 출신이다. 6승을 올렸고 올해의 선수상도 받았다. 둘 다 최고 메이저라는 US 여자오픈 챔피언 출신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올 시즌은 국내 대회에 종종 출전하고 있는데 KLPGA 투어 국내 대회 동반 출전은 무려 7년 만이다.
6월 내셔널 타이틀 대회인 한국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뒤로 슬럼프 아닌 슬럼프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유소연이 “골프를 치다 보면 정말 ‘멘붕’이 오는 때가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최나연은 “맞아, (박)인비도 그랬다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나연·유소연과 박인비·신지애·이보미 등 7명의 황금세대 멤버는 2년 전부터 ‘V157’이라는 모임도 갖고 있다. 결성 당시 7명의 우승 횟수 합산이 157승이었다. 각각 모임 내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묻자 유소연은 “7명 중에 역할은 총무인 저밖에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각자 캐릭터가 다 강해서 거기에 충실한 것 같다”는 설명이다. “무슨 일이든 서로 직언해주는 분위기가 있다”고도 한다. “얘는 아마 평생 총무를 맡아야 할 것 같다”고 유소연의 옆구리를 찌른 최나연은 “모임의 마스코트는 (이)보미”라고 소개했다. 7명은 지난해 말 베트남으로 여행도 다녀왔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로는 주로 온라인으로 소통하면서 이따금 필드 라운드 모임을 한다. ‘은가비’라는 봉사모임의 일원이기도 한 최나연·유소연은 연말 기부금 전달도 계획하고 있다.
국내 투어 출신으로 미국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둔 둘은 국내 무대가 ‘나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했다. “특정 홀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어린 후배들한테 물어보면 다른 홀, 다른 코스도 비슷하다고 해서 두 번 놀라고는 해요. 핀 위치도 엄청나게 어려운데 다들 스코어를 잘 내더라고요. 그만큼 실력이 좋아졌다는 거죠. 이렇게 어려운 코스 세팅에 적응을 해두면 해외 나가서도 잘할 수 있을 거예요.”(최나연) “언니, 그렇게 말하면 애들 더 고생해(웃음). 제가 국내 뛸 때만 해도 전문 캐디가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전문 캐디랑 일해요. 미국 투어에나 있던 피트니스 밴이 대회장마다 따라다니는 것도 신기하고요. 확실히 체계화된 느낌이에요.”(유소연)
앞으로의 선수 생활에 서로 바라는 점을 물었더니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유형 검사 얘기가 나왔다. “재미 삼아 검사를 해봤는데 모임 멤버 7명 중에 저랑 (유)소연이만 결과가 똑같이 나오더라고요. 완벽주의자라나요. 스스로 정한 기준에 조금만 못 미치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면 그 스트레스를 연습량으로 푸는 거죠.” 최나연은 “대회 마친 바로 다음 날에도 피트니스센터에 가는 게 소연이다. 취미생활마저도 스케줄을 잡아놓고 딱딱 맞춰서 계획적으로 한다”며 “저도 예전에는 비슷한 스타일이었는데 그걸 내려놓은 지금은 많이 편해졌다. 소연이의 생활에 ‘즉흥’이 가미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유소연은 “지난해가 저한테는 굉장히 힘들었던 해인데 언니가 말한 딱 그 이유로 그렇게 괴로웠다”고 돌아보며 “앞으로는 우승이나 올림픽 같은 목표보다는 제가 사랑하는 일을 재미있게 하는 데 몰두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언니는 성공도 해봤고 또 부상으로 큰 고생도 했는데 그럼에도 처음처럼 골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후배로서 정말 보기 좋다. 아이디어가 워낙 많은 선배라 후배들을 위해 할 일이 많을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목표나 성취에 몰입하는 게 저 자신에게 약이 되는 시기가 아닌 것 같다. 골프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생각이 점점 커져야 행복해질 것 같다”는 유소연의 말에 최나연이 한마디 거들었다. “20대 때 골프랑 30대 때 골프는 다른 것 같아.”
/서귀포=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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