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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성 브릭티우스 축일의 학살

1002년 잉글랜드, 데인족 척살령

성 부릭티우스의 축일, 애설레드 2세의 학살 명령으로 잉글랜드 병사들에게 덴마크 국왕 스벤 2세의 여동생 굴히데가 죽임 당하는 그림.




‘이 땅의 모든 데인족(Danes)을 척살하라.’ 잉글랜드 국왕 애설레드 2세(Æthelred Ⅱ·46세)가 성 브릭티우스 축일인 1002년 11월 13일(금요일)에 내린 명령이다. 얼마나 많은 데인족이 학살당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지난 2008년 옥스퍼드대학 경내를 발굴할 때 데인족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대거 발굴된 적도 있으나 전체 희생 규모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애설레드의 무모함과 데인족의 보복. 애설레드는 세력이 만만치 않은 데인족을 상대로 승산 없는 싸움을 걸었다.

데인족은 북게르만의 일파로 덴마크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해적질은 물론 유럽 전 지역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바이킹 종족. 흑해와 카스피해를 지나 강을 거슬러 러시아 지역에 나라를 세운 적도 있다. 파리를 함락당하기도 했던 프랑스는 데인족에게 900년께 거대한 영지(노르망디)를 떼주며 간신히 눌러 앉혔다. 잉글랜드도 프랑스처럼 바이킹의 침략을 받았으나 사정이 달랐다. 무엇보다 내줄 땅이 마땅치 않았다. 길고 긴 싸움 탓이다.

켈트족과 로마화한 켈트족의 내분에 주트·색슨·앵글 등 게르만족이 먼저 끼어들었다. 좁은 섬에서 7개 왕국을 비롯한 100여 개 소국으로 갈라졌던 분열을 극복한 게 불과 110여 전 년. 알프레드 대왕이 통일을 이룰 무렵부터 등장한 데인족은 보다 끈질겼다. 잉글랜드가 강하면 복속하고 약하면 공격해 들어왔다. 애설레드는 1002년 봄 데인족에 뇌물을 바치고 평화를 구걸했다는 오명을 씻겠다는 의욕만 앞섰을 뿐 준비도 대안도 없었다.



‘성 브릭티우스 축일의 학살’로 자신의 여동생까지 희생됐다는 소식을 들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스벤 1세는 1003년 대군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짓이겼다. 10년 전쟁 끝에 애설레드는 처가인 노르망디로 도망치고 잉글랜드 왕좌는 스벤 1세의 아들인 크누트 대왕에게 돌아갔다. 크누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관까지 차지해 한때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제국(북방제국)’이 성립되기도 했다.

성 브릭티우스 축일의 학살이 초래한 잉글랜드의 세력 개편은 세계사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언어부터 크게 변했다. 한국어처럼 어미 변화가 많던 고대영어가 바이킹의 영향으로 어순이 중시되는 중세영어로 바뀌었다.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궁정의 주 무대가 덴마크인 것도 13세기의 유산이다. 길고 긴 전쟁 과정에서 왕과 신하 간 협약이 수시로 맺어지고 종국에는 1215년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으로 이어졌다. 갈등과 학살이 의회 민주주의의 태동에도 흔적을 남긴 셈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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