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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스코틀랜드 학교설립법

1616년, 계몽주의 확산 산실

학교설립법에 따라 세워진 고등 의료교육 기관인 조지 해리엇 병원의 본부 건물. /위키피디아




47%와 20%. 둘 다 스코틀랜드인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전자는 빅토리아 시대 인도에 파견된 사무관급 이상 관리 가운데 스코틀랜드 출신의 점유비, 후자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지원병의 비율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1707년) 이래 인구 비율은 5.5~10 대 1 수준. 숫자가 훨씬 적었던 스코틀랜드인들의 대외 활동이 두드러진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교육에 있다.

18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의 문자 해독률은 76%.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글래스고대를 졸업한 애덤 스미스가 케임브리지대로 유학했으나 지적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학풍에 실망하고 일찍 돌아간 적도 있다. 통합 당시 스코틀랜드의 대학은 5개로 잉글랜드(2개)보다 많았다. 학비도 훨씬 낮았다. 잉글랜드의 20% 수준.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이런 말도 남겼다. ‘어느 도시든 에든버러(의 교육 수준)와 경쟁이 불가능하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조상이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보다 단적인 통계도 있다. 이영석 광주여대 명예교수의 ‘근대의 풍경’에 따르면 19세기 내내 대영제국 내 학위 소지 의사의 90%가 스코틀랜드에서 나왔다. 스코틀랜드는 일찌감치 교육에 눈을 돌렸다. 1496년 교육법을 만들어 모든 귀족과 지주 자제의 문법 학교 입학을 의무화했다. 체계적인 교육은 종교개혁과 함께 찾아왔다. 잉글랜드와 달리 캘빈의 장로교회를 받아들인 스코틀랜드는 각 교구에 초급과 중급 교육을 맡겼다.



국가와 의회도 적극 거들었다. 1616년 12월 10일 최초의 학교설립법이 제정돼 교구의 학교 운영과 국가의 예산 지원 체계를 명시했다. 학교설립법은 불만을 사고 악평도 받았다. 영국 국왕(제임스 1세)을 겸임한 제임스 6세가 영어 사용을 장려하고 ‘난폭한 게일어’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6세가 사망한 뒤에도 스코틀랜드는 1633과 1646년·1686년 잇따라 학교법을 제정해 교육 시스템을 다졌다.

스코틀랜드의 교육개혁이 없었다면 계몽주의의 확산도, 프랑스 혁명도 더 늦게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존 로와 프랜시스 허치슨,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제임스 와트, 로버트 번스, 토머스 칼라일 등이 스코틀랜드의 학풍과 계몽주의 분위기에서 성장해 이름을 떨쳤다. 또다시 비율을 보자. 60% 이상.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과연 영국과 결별할까. 브리튼보다 유럽인으로 남자는 공감대가 갈수록 확산하는 분위기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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