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삶을 어떠한 그릇에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선택의 문제이다. 건축디자인 프로세스로 보면 과거에는 주로 법(法)의 테두리 속에서 경제성만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문화를 고려하는 추세이며 최근에는 한발 더 나아가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건축에서 문화와 철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건축물이 독립된 하나의 점(点)이 아닌 선(線)과 면(面)으로 이어지는 도시적 맥락에서 이해된다는 방증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다양한 무늬들로 채워진 여러 층의 ‘터(址)’가 켜켜이 쌓여 있어 유구한 역사의 흔적을 보여 준다. 특히 근대기에는 서울 정동 일대를 비롯해 부산·인천·목포·군산 등에 근대적 개념의 개항 도시들이 만들어졌다. 이와 함께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건축물들로 이뤄진 ‘터’가 생겨났고 여기에 각각의 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무늬’가 내려앉았다.
20세기 들어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되면서 이 무늬들이 하나둘씩 훼손되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2001년에 ‘등록문화재’제도를 제정해 이러한 곳들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민관을 불문하고 문화유산의 보존이라는 명분보다는 개발이익 확보를 위한 경제 논리가 여전히 우세하다.
내년이면 등록문화재제도가 시행된 지 어느덧 20년이 된다. 사람으로 치면 약관(弱冠)의 나이로, 관례를 올려 갓을 쓰게 하고 성인으로 대접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약관의 나이에 걸맞게 근대문화유산의 보존과 관리 환경도 변해야 할 때가 됐다. 도시적 맥락 속에서 건축을 보듯이 한 점(点)의 문화유산이 아닌 ‘터’에 새겨진 ‘무늬’를 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용준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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